남편의 비밀 에스파도
그날 밤, 남편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나는 광야의 나비"라는 노랫말이 내 세계를 뒤흔들었다. 새벽 세 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거실 소파에서 잠든 남편의 핸드폰 화면이 파란빛으로 깜빡였다. 누군가의 메시지였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여 화면을 열었을 때, 어떤 비밀을 발견할지는 상상조차 못했다.
화면에는 "오늘 밤 광야 공연 대박이었어. 넥스트 레벨 안무 완벽했어!"라는 메시지와 함께 40대 중년 남성들로 가득한 단체 사진이 있었다. 모두가 검은 옷에 형광 네온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우리 남편 김도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배경은 분명 콘서트장이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15년 차 우리 부부 사이에 이런 비밀이 있으리라고는. 남편은 자신이 회계사 모임에 간다고 했었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남편의 갤러리를 열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숨겨진 폴더 하나. 비밀번호는 우리 결혼기념일이었다.
폴더가 열리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수십 개의 콘서트 사진들, 에스파 포스터, 심지어 '마이'라는 이름의 네온 봉까지.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남편이 검은 가발을 쓰고 '블랙맘바' 코스프레를 한 사진이었다. 조용한 회계사인 내 남편은 밤이 되면 열렬한 에스파 'MY'(팬덤)로 변신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난 커피를 마시며 태연하게 물었다. "여보, 에스파 알아?" 남편의 손에서 신문이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냥... 요즘 유명하다길래," 나는 더 압박했다. "블랙맘바는 어때?" 남편은 이제 완전히 얼어붙었다.
"미안해..." 그가 중얼거렸다. "창피해서 말 못했어. 모두가 날 웃을까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45살 회계사가 아이돌 좋아한다고 하면..." 그의 고백을 들으며, 우리 관계에 새로운 균열을 발견한 것 같았다. 15년간 나는 남편의 진짜 열정을 몰랐던 것이다.
"이번 주말에 에스파 콘서트 있다던데," 내가 말했다. 남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같이 갈래? 난 네가 좋아하는 걸 알고 싶어." 남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함께 에스파의 노래를 들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나도 그 리듬에 빠져들었다.
주말 콘서트장에서, 형광 팔찌를 차고 "나는 광야의 나비!"를 외치는 남편을 보며 생각했다. 15년의 결혼 생활이 지루했던 건 아니었을까? 서로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용기가 없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에겐 각자의 '광야'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에스파 사랑을 통해, 우리는 결혼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다. 때로는 가장 예상치 못한 비밀이 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 우리 거실에는 두 개의 네온 봉이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검은색, 하나는 분홍색. 가끔 아이들이 잠든 밤, 우리는 함께 "넥스트 레벨"을 부르며 춤을 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숨겨진 광야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