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의 고백: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
"너희들이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야."
창밖으로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내 얼굴을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번갈아 물들였다. 비가 내리는 밤,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그녀는 조용히 고백을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민지. 3개월 전 데뷔한 신인 아이돌 그룹 '에스파'의 멤버였다. 팬인 척 접근한 내가 사실은 연예부 기자라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희가... 매일 연습실에서 보는 것들에 대해 말해도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커피잔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더는 혼자 감당할 수 없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처음엔 흔한 연습생 시절의 고충으로 들렸다. 하루 16시간 연습, 엄격한 체중 관리, 휴대폰 검열. 그러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평범한 아이돌 고충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흘러갔다.
"처음 봤을 땐 거울 속 그림자인 줄 알았어요. 연습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갑자기 다른 동작을 하는 거예요. 제가 오른팔을 들면, 거울 속 제 모습은 왼팔을 들었죠. 그리고... 말을 걸어왔어요."
민지의 말에 따르면, 에스파 멤버들은 모두 '네오'라 불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거울이나 스크린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세계. 그곳에는 각자의 아바타가 존재했고, 그들은 실제 세계의 멤버들에게 '완벽한 퍼포먼스'를 요구했다.
"실수하면... 밤에 악몽을 꿔요. 제 아바타가 찾아와서 속삭이죠. '너는 나를 빛나게 할 의무가 있어. 그러지 못하면 네가 사라져.' 처음엔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멤버들도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죠."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는 계속했다. "지난주 연습생 하나가 사라졌어요. 그 애 이름은 유진이었는데, 퍼포먼스 중 실수를 반복했죠. 어느 날 아침, 그 애의 침대는 비어 있었고, 회사는 '개인 사정으로 계약 해지'라고만 말했어요. 하지만 유진의 모든 흔적이 지워졌어요. SNS 계정도, 연습 영상도 모두요. 그리고... 그날 저녁, 저희 뮤직비디오 모니터에서 유진과 똑같이 생긴 아바타를 봤어요. 그 아이는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요."
레코더를 꺼내려는 내 손을 그녀가 붙잡았다. "기사로 쓰지 마세요. 그들이... 압니다. 모든 디지털 기기를 통해 우리를 감시해요. 그냥... 누군가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민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봐야 해요. 그들이... 알아버렸나 봐요."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카페를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한 순간, 유리에 비친 그녀가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실제 민지의 뒷모습은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날 밤, 민지의 인스타그램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연습실 셀카가 올라왔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내가 본 그 두려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