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의 시간대: 미래로 흐르는 드라마
내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아직 내가 쓰러지기 전의 나와 에스파의 태연이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가 시간을 관통한 것이었다.
"당신은 지금 현실과 가상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어요." 태연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울렸고, 방 안의 태연은 여전히 다른 나와 대화하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그녀의 실버 헤어가 반짝이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했다.
나는 스물여덟 살 드라마 작가. 에스파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난 곳은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세계였다.
"이건... 쿠엔타라는 거야?" 내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대신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은 내가 알던 도시가 아니었다. 네온 불빛이 건물 외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홀로그램 광고판에서는 에스파의 'Next Level' 퍼포먼스가 공중에 펼쳐졌다.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하늘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내 손에는 완성되지 않은 시나리오가 들려있었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던 바로 그 대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그 다음 페이지가 채워져 있었다.
"당신이 쓴 결말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당신의 드라마가 됩니다." 갑자기 나타난 윈터가 말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내 불안을 잠재웠다. "우리는 당신이 만든 캐릭터이자, 당신을 만든 창조자예요. 역설적이죠?"
내가 쓴 드라마의 세계관에서 에스파 멤버들은 현실과 가상 세계를 오가며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에서 태어난 '블랙 맘바'와 싸웠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이들의 표정은 내가 설정한 것보다 훨씬 복잡했고, 그들의 움직임은 내 손끝에서 태어난 문장보다 생동감 있었다.
"당신의 드라마는 미완성이에요. 그리고 그 결말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죠." 카리나가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길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당신의 상상력이 멈추면, 우리의 세계도 멈춰요."
그때 창밖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블랙 맘바. 내가 쓰다 만 결말 속 적이었다. 닝닝이 창가로 다가와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불안이에요.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두려움이 실체화된 거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완벽한 결말을 찾지 못한 이유는 결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내 손이 저절로 움직여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백지 위에 펜이 춤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신의 드라마 속 캐릭터지만, 당신 또한 누군가의 드라마 속 인물일지도 모르죠." 내가 쓴 문장이 에스파의 목소리로 울렸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창조자인 동시에 피조물인 것처럼, 현실과 드라마 사이의 경계도 결국은 환상에 불과했다.
내 눈앞에서 에스파 멤버들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내 앞에는 완성된 대본이 놓여 있었다. 마지막 문장은 낯선 필체로 쓰여 있었다: "모든 드라마는 현실이 되고, 모든 현실은 누군가의 드라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