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의 사진: 삼십 년의 기억
남편의 지갑에서 떨어진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것은 에스파의 카리나가 잘 나온 팬사인회 사진이었다. 남편의 손길이 닳아버린 오래된 사진 한 장에 모든 의문이 담겨있었다.
"여보, 이거 누구 사진이야?"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식탁 너머로 남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콘서트에 가본 게 언제였더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무렵,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에스파의 광팬이었다고 했다. 결혼 후에는 그런 취미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 그거..." 남편의 말이 흐려졌다. 창밖으로 내리는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오래된 비닐하우스처럼 우리의 결혼 생활이 빗소리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남편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2023년, 에스파의 팬사인회에서 카리나에게 받은 사진 한 장이 그에게는 특별했다. 그 해 말,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던 그는 병실에서 그 사진을 매일 바라보며 삶의 의지를 다졌다고 했다. 수술 후 기억 상실의 후유증으로 많은 것을 잊었지만, 그 사진만은 지갑에 넣고 다녔다고.
"난 그때 기억이 없어. 하지만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어. 내게 소중했던 어떤 순간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걸 느껴."
나는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시간들이 안타까웠다. 다음 날, 나는 잊고 있던 오래된 상자를 다락방에서 꺼냈다. 그 안에는 내가 간직했던 남편의 병원 일지와 그가 의식이 없던 시절, 내가 대신 작성했던 일기들이 있었다.
8월 16일 - 오늘도 그의 지갑에서 에스파 사진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줬다. 의사는 익숙한 것들이 기억을 자극할 수 있다고 했다. 제발 돌아와 주세요.
상자 맨 아래에는 우리의 청첩장이 있었다. 결혼식 날짜는 2023년 9월, 그가 팬사인회에 다녀온 직후였다. 그리고 그 옆에, 내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 에스파 카리나와 똑같은 헤어스타일, 똑같은 의상을 한 채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첫 만남이 카리나 코스프레 이벤트였다는 사실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두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진짜 카리나의 사진과 카리나처럼 꾸민 내 모습. 남편이 사랑했던 것은 아이돌이 아니라, 그 모습으로 그를 처음 웃게 만들었던 나였다. 깨달음의 따스함이 가슴을 채웠다. 사진 속에 갇힌 기억이 서서히 풀려나올 시간이었다.
오늘 밤, 남편에게 다시 코스프레를 할 생각이다. 어쩌면 그의 기억 속에서 잠자던 우리의 첫사랑이 깨어날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충전하며 생각한다. 때로는 사진 한 장이 수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