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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소개팅

환상의 에스파, 소개팅의 미로

그 여자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소개팅 테이블에서 와인 메뉴를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피노 누아가 좋을 것 같아요, 당신 취향이잖아요."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내 와인 취향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죄송해요, 에스파 능력이 가끔 통제가 안 돼서..." 그녀의 목소리는 카페의 재즈 선율 속에 섞여 마치 먼 바다의 파도처럼 들려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커피 표면처럼 잔잔히 일렁였다. 에스파. 초감각적 지각 능력자.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사람들.

"괜찮아요. 놀랐을 뿐이에요." 내 목소리는 의도한 것보다 더 쉰 소리로 나왔다. 그녀의 붉은 립스틱이 와인잔 테두리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내가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생각도 읽었을까?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은 소용없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생각하지 않으려는 생각도 결국은 생각이니까요." 치킨 샐러드를 포크로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가락이 창백한 조명 아래서 춤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저는 허락 없이 깊이 들어가진 않아요. 표면만 스치는 정도죠."

다른 소개팅과는 전혀 달랐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이미 내가 세 번의 실연을 겪었고, 밤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며,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시를 쓴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당신 시가 아름다워요. 특히 '어둠 속의 불빛'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창피함과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고, 가면을 쓸 필요도 없는 관계. 하지만 공포도 함께 밀려왔다. "온전한 프라이버시는 없는 건가요?"

"모든 관계에는 경계가 필요해요."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뭔가가 바뀌었다. 마치 창문에 커튼이 내려진 듯했다.

디저트를 기다리는 동안,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데이트 어플에서 당신 프로필을 봤을 때, 왜 만나자고 했어요? 저에 대해 뭘 알았죠?"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당신이... 빈 공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같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공간을 채우려고 하지만, 당신은... 침묵을 견딜 수 있는 사람 같았거든요."

계산서를 기다리며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에스파이지만, 대부분은 그 능력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녀를 다시 만날지 결정하기 전에, 나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건 당신이 말로 표현해줬으면 해요. 가끔은 평범하게 소통하는 것도 필요하니까요."

어쩌면 이것이 가장 진실된 소개팅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비밀이 없는, 혹은 모든 것이 비밀인, 그런 관계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