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의 아이돌: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블랙맘바가 처음 내 귀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그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연습생 시절부터 꿈꿔왔던 무대는 생각보다 더 차갑고 현란했다. SM 엔터테인먼트의 대형 연습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춤을 추고 노래했다. 에스파라는 이름으로 데뷔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의 아바타를 만나볼 시간이야, 지수." 프로듀서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 속에는 내가, 아니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분명히 다른 존재가 있었다. 블루 머리카락에 완벽한 몸매,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표정. "ae-지수야. 네가 쉴 때 활동하고, 네가 실수할 때 커버해주는 또 다른 너."
연습실 한쪽 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켜지고, 내 아바타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한 치의 결점도 없는 움직임. 나의 피로와 불안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완벽함이 두려워졌다.
"광야에서 만나자." 그녀의 목소리는 정확히 내 목소리였다.
데뷔 무대는 폭발적이었다. 나와 ae-지수, 그리고 다른 멤버들과 그들의 아바타가 함께 만들어낸 세계관은 팬들을 열광시켰다. 우리는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아이돌이 되었다. 내가 지치면, ae-지수가 SNS에 글을 올렸다. 내가 아플 때, 그녀가 광고 촬영을 대신했다.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어느 날 밤, 연습을 마치고 거울을 바라봤을 때 나는 흠칫 놀랐다. 거울 속 내 얼굴이 순간 ae-지수의 얼굴로 변했다가 돌아왔다. 환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됐다. 내가 실수할 때마다 귓가에서 ae-지수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팬들은 점점 더 ae-지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소셜미디어에는 "ae-지수가 실제 지수보다 춤을 더 잘 춘다", "ae-지수의 목소리가 더 안정적이다"라는 댓글들이 올라왔다. 회사는 이런 반응에 ae-지수의 활동 비중을 높였다.
어느 날 홀로그램 광고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거대한 전광판에 ae-지수가 웃고 있었다. 내가 촬영한 적 없는 광고였다. 핸드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광고는 네가 필요 없었어. ae-지수가 직접 찍었거든. 이제 그녀는... 너 없이도 활동할 수 있어."
폰을 내려놓았을 때,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은 점점 블루 머리카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에스파의 아이돌로서, 나는 이제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