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와 여사친: 두 세계 사이에서
여자친구와 여사친의 경계는 종이보다 얇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내 폰에서 에스파의 'Next Level'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짓는 그 미묘한 표정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또 민지야?" 수진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눈빛은 달랐다. 우리는 대학 입학 때부터 4년째 '베프'로 불리는 사이였다. 그것이 우리 관계의 공식 명칭이었다. 여사친. 묘하게도 그 단어는 관계의 한계를 정확히 규정하는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응, 오늘 저녁에 팬미팅 티켓 예매한다고." 나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민지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함께 에스파의 광팬이 된 친구였다.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카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그거 알아? 에스파의 '블랙 맘바'는 가상세계 '애스파'에서 멤버들의 아바타가 싸우는 악의 존재래." 갑자기 수진이 말했다.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계... 우리도 좀 그런 것 같지 않아?"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였다. 갑자기 민지에게 보내려던 메시지가 무의미해졌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물었다.
"우리... 뭐지? 현실의 우리는 여사친이지만, 가끔 나는 다른 세계의 우리를 상상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지하철에서 내 머리를 너의 어깨에 기대게 할 때, 우리가 밤늦게 전화할 때,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다른 세계의 버전이 된 것 같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코지 카페의 소음, 바리스타의 움직임,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모두 희미해졌다. 내 폰이 다시 울렸다. 에스파의 멜로디. 하지만 이번에는 민지가 아니었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수진이 말했다. "그냥 인정하기 두려웠던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우리는 '여사친'이라는 안전한 경계 안에서 살아왔다. 그 테두리를 넘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에스파의 세계관처럼, 우리도 선택해야 해," 내가 천천히 말했다. "현실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것인지."
수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우리의 손가락이 얽히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 여사친과 그 이상의 관계 사이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만의 'Next Level'로 진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