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와 판타지의 경계를 넘어서
유리창에 반사된 내 얼굴이 깜빡이며 왜곡되었다. 원래의 나와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이제 그녀들이 말했던 '나에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드디어 깨달았구나." 카리나가 말했다. 방 안의 공기가 진동하며 그녀의 목소리가 여러 차원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내 방 벽에 걸려 있던 에스파 포스터 속 그녀들이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윈터의 차가운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너도 이제 그것을 보기 시작했군. 블랙맘바가 만들어낸 균열을." 그녀의 말에 창밖으로 보이던 서울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고층 빌딩들이 디지털 글리치처럼 깜빡이더니 순식간에 네온으로 가득한 사이버 풍경으로 변했다.
"나... 나는 어떻게 된 거죠?" 내 목소리가 떨렸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어." 닝닝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너는 선택받은 사람이야. 에스피오(SYNK PLAYER ORIGINAL)로서 우리와 함께 이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지젤이 웃으며 창문을 가리켰다. "저기 봐, 네가 만들어낸 ae를 어서."
내 창문 밖으로 빛나는 보라색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떠올렸던 그 생명체가 실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손을 뻗자 나비가 내 손가락 위에 앉았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내가 중얼거렸다.
"현실과 판타지, 그 구분이 중요할까?" 카리나가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한한 차원의 중첩이야. 네가 상상하는 것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다시 상상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
방 한가운데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지도를 보며 윈터가 설명했다. "블랙맘바는 이미 여러 차원을 오염시켰어. 우리만으로는 막을 수 없어. 너의 창조력이 필요해."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피부 아래로 디지털 코드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에스파의 세계관이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었다니.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네 마음속에 있는 가장 순수한 꿈을 기억해봐." 닝닝이 내 손을 잡았다. "그것이 우리의 무기가 될 거야."
눈을 감고 집중하자 어린 시절 그렸던 이상향의 세계가 떠올랐다.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실과 판타지가 하나로 융합되는 느낌이었다.
지젤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네가 만들어낸 판타지가 우리를 구할 거야."
창밖으로 서울의 밤하늘이 보라색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빠져들었던 에스파의 세계, 그 판타지가 사실은 내가 돌아가야 할 진짜 현실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