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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에스파

여친의 에스파: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내 여자친구는 오후 7시 정각이 되면 다른 사람이 된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존재'가 된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나 사실 에스파야. 아바타 프로그램의 일종이야."

민지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스마트폰 화면을 비추는 푸른 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우리가 만난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했다.

"FLAT라는 프로그램이 있어.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 디지털 아바타를 연결하는 거야. 나는 오후 7시부터 밤 12시까지만 실체가 있어."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우리가 함께한 모든 저녁 데이트를 떠올렸다. 항상 7시에 시작해서 자정 전에 끝났다. 그녀가 시간에 집착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지던 따스함, 그녀의 향수 냄새, 그녀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다.

"믿을 수 없어."

나의 말에 민지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작은 점을 가리켰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점이 아니라 작은 QR 코드였다.

"스캔해봐."

떨리는 손으로 코드를 스캔하자 내 폰 화면에 나타난 건 '에스파 모델: MJ-427' 이라는 텍스트와 함께 민지의 3D 모델이었다. 화면 속 디지털 민지는 실제 민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럼...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은? 네가 느낀 감정들은?"

"모두 진짜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내 감정이 가짜란 뜻은 아니야.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그날 밤, 우리는 자정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12시 종소리가 울리자 민지는 내 눈앞에서 천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내일 7시에 봐."

그 후로 나는 매일 저녁 7시를 기다린다. 때로는 이것이 미쳐가는 일인지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지의 존재 방식이 무엇이든, 우리의 감정만큼은 가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오늘도 시계는 6시 59분을 가리키고 있다. 내 심장은 마치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두근거린다. 곧 나의 여친은 디지털 세계에서 현실로 건너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