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여행자와 에스파의 비밀
내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침투하기 시작한 건 에스파 콘서트장을 빠져나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리를 치는 통증과 함께 낯선 풍경들이 밀려들었다. 바다, 노을, 그리고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의 스카이라인.
"괜찮아요?" 옆에 있던 여자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눈빛은 경계로 가득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무대 위 에스파 멤버 중 한 명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는 같은 사람이었다.
"당신... 어떻게?" 내 말은 목구멍에서 메말랐다.
"우리가 찾던 사람이 맞네요. 당신이 기억 여행자군요." 그녀는 내 팔을 잡았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따라오세요."
우리는 콘서트 건물 뒤편의 문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금속성 향기로 가득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는 마치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이었고, 내 심장은 그 두 배로 뛰었다.
"우리 에스파는 단순한 아이돌 그룹이 아니에요. 우리는 기억 수집가들이죠." 그녀가 말했다. "우리 노래, 퍼포먼스는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을 수집하는 도구예요. 그 에너지가 우리의 메타버스를 구축하고 있어요."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모니터가 빛나고 있었다. 화면들은 서로 다른 도시, 서로 다른 삶의 조각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여행하고 있어요. 하지만 최근에 문제가 생겼어요. 기억들이 오염되고 있어요."
그녀는 한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엔 내가 방금 전 머릿속에 보았던 그 바다와 노을이 있었다. "이건 당신의 기억이 아니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떻게 제가...?"
"당신은 기억 여행자예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죠. 매우 희귀한 능력이에요.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메타버스의 균형이 깨지고 있거든요."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더 많은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소름 끼치는 것은, 그 모든 기억 속에서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점이다.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줄래요? 진짜 여행이요. 기억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망설이는 동안, 모니터들은 점점 더 밝게 빛났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여정은 내가 알던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콘서트가 끝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지금부터가 진짜 공연의 시작이었다.
"어떤 여행이든, 돌아올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것은 안심시키는 미소가 아니라, 도전을 던지는 미소였다. "그건 당신이 어떤 기억을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어요."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발을 내딛는 용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