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의 사랑: 그가 남긴 흔적들
그의 모든 흔적을 지우는 데는 정확히 42분이 걸렸다. 사진을 삭제하고, 선물을 상자에 담고, 함께 쓴 일기장을 찢어내는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별 후 일주일, 마침내 용기를 내 그와의 2년을 정리했다. 남친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낯설게 느껴졌다.
"정말 다 지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상담실의 가죽 소파에 앉아 말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내 얼굴을 따뜻하게 비추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차가웠다.
상담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무엇이 지워지지 않았나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있는 그의 손 느낌이요. 비 오는 날 우산을 함께 쓸 때마다 자연스럽게 맞잡았던 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여전히 우리로 보여요. 혼자인데도."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미치겠어요. 사랑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으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남긴 건 보이지 않는 것들뿐이에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떠오르는 기억들, 특정 카페의 향기,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느껴지는 기대감..."
상담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물었다. "그 모든 것이 정말 지워야 할 것들인가요?"
질문이 가슴에 꽂혔다. 지난밤 우연히 발견한 책갈피가 떠올랐다. 그가 내 생일에 선물한 작은 나무 책갈피. 뒷면에는 "너의 이야기가 계속되길" 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우지 못한 그 한 조각이 떠올랐다.
"아마도... 모든 흔적을 지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솔직히 말했다. "그와의 사랑이 내게 남긴 것들이 있어요. 더 잘 경청하는 법, 작은 행복을 발견하는 눈,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된 마음..."
상담실을 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펴지 않고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감각을 느꼈다.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은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빗방울이 모였다. 이제 그 자리에는 그의 손이 아닌, 내 이야기가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