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사진: 잠긴 기억의 판을 열다
할아버지의 다락방에서 발견한 오래된 보드게임 상자 위에 먼지가 흩날렸다. 무심코 손을 뻗어 닦아내니, '기억의 장기판'이라는 희미한 글씨가 드러났다. 여느 장기판과 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말들이 모두 사진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할아버지가 평생 만들어온 거란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다가와 상자를 열었다. 장기판 위에 정교하게 깎인 나무 말들이 있었는데, 각 말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이 붙어 있었다. 어떤 말에는 웃고 있는 여성의 얼굴, 또 다른 말에는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 또 다른 말에는 낡은 시골 집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규칙은 간단해. 말을 움직일 때마다 그 사진에 담긴 기억을 이야기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손이 떨리며 '장군'이라 적힌 말을 집어 들었다. 그 말에는 젊은 여자의 미소 짓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 분이 네 할머니야.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사진관에서 일하고 있었지."
할아버지의 눈에 그때의 반짝임이 돌아왔다. 나는 '사'라고 적힌 말을 집어 들었다. 앳된 소년의 모습이 붙어 있었다.
"그건 네 아버지란다. 그가 태어난 날,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이지. 손이 너무 떨려서 초점이 맞지 않았어."
우리는 말을 하나씩 움직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장기판은 점차 할아버지의 인생 지도로 변해갔다. 기쁨, 슬픔, 후회, 희망이 말들 사이를 오갔다. 모든 말이 판에서 벗어날 때마다 하나의 인생 장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말을 움직였을 때, 할아버지는 상자 바닥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네 차례다. 이제 네 기억의 말을 만들 시간이야."
봉투 안에는 조그만 나무 말과 함께 빈 사진 종이가 들어있었다. 할아버지는 케이스에서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인생은 보드게임 같아. 규칙은 있지만, 매 판은 다르게 흘러가지. 하지만 중요한 건 게임이 끝난 후에도 남는 것들이란다."
창문으로 비친 햇살 아래, 할아버지와 내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폴라로이드에 담았다. 사진이 현상되는 동안, 문득 깨달았다. 이 보드게임에서 진정한 승리는 말을 따먹는 것이 아니라, 말에 담긴 이야기를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