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속 판타지: 마지막 주사위를 굴릴 때
마을이 불타오르고, 내 앞에 놓인 주사위는 차갑게 빛났다. 모두의 운명이 이 육면체 안에 갇혀 있었다.
나는 보드게임 '에테리아의 문'의 마지막 플레이어였다. 우리 넷은 매주 금요일 밤, 도서관 지하실에서 이 게임을 했다. 오늘까지. 지금까지는 그저 즐거운 판타지 게임일 뿐이었다. 드래곤을 물리치고, 엘프 왕국을 구하고, 마법의 유물을 찾는 여정. 하지만 민수가 중고샵에서 발견한 이 빛바랜 확장팩을 열었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마스터 룰"이라 쓰인 양피지에는 경고문이 있었다. '게임이 현실이 되리라.' 우리는 웃으며 무시했다.
주사위를 굴릴 때마다 보드판 위 미니어처들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턴, 지수가 '어둠의 숲' 타일에 자신의 기사를 놓았을 때, 방 안에 나뭇잎 냄새가 퍼졌다. 일곱 번째 턴, 정훈이 '불의 산' 카드를 뽑았을 때, 테이블 위로 재가 떨어졌다.
우리의 놀란 표정이 점차 공포로 변해갔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룰북에는 분명했다. '시작된 게임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
민수가 먼저 사라졌다. 그의 캐릭터가 '심연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는 비명과 함께 의자에서 연기처럼 증발했다. 그의 미니어처만이 보드 위에 남았다.
지수와 정훈도 차례로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남은 건 나뿐이었다. 최종 보스 '망각의 군주'를 물리칠 마지막 기회를 가진 유일한 플레이어.
내 손은 떨렸다. 주사위를 만지자 손가락이 저릿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고대 성벽으로, 가로등이 횃불로, 자동차들이 말이 끄는 마차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6이 나오면 망각의 군주는 무너지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다른 숫자가 나오면... 나는 영원히 이 판타지 세계의 일부가 된다.
주사위를 손에 쥐고 내가 소파에서 발견한 낡은 보드게임 상자를 떠올렸다. "소원을 이루는 판타지 여행"이라는 화려한 글씨 아래 작게 적힌 경고를 무시했던 순간을. 이제 와서 깨달았다. 우리가 게임을 한 것이 아니라, 게임이 우리를 플레이한 것이다.
주사위를 굴렸다. 테이블 위를 굴러가는 주사위의 모서리마다 현실과 판타지가 교차했다. 주사위가 멈췄다. 그리고 나는 미소지었다. 가끔은, 판타지가 현실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