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형광등 아래, 사랑이 피어나는 직장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사무실 창가에서부터 그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이주연은 매일 밤 초과근무를 마치고 나갈 때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마케팅팀 김도윤. 그는 늘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를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타이핑하고 있었다.
"혹시 야근하시는 거예요?" 어느 날 밤, 이주연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요, 소설을 쓰고 있어요. 낮에는 마케팅 자료를, 밤에는 내 이야기를 써요."
커피 자판기 앞에서 시작된 대화는 야근이 끝난 후 사무실 건물 앞 포장마차로 이어졌다. 소주 한 잔에 도윤은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 이야기를 했다. 직장에서는 볼 수 없던 그의 눈빛에서 주연은 깊은 열정을 발견했다.
"직장은 내 몸을 먹여 살리지만, 글쓰기는 내 영혼을 살려요." 도윤이 말했다.
주연은 그날 밤 처음으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녀 역시 회계팀에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창고처럼 좁은 원룸에서 캔버스와 물감 사이에 숨어 사는 또 다른 자아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숨겨진 꿈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공감이 자라났다. 직장이라는 현실과 예술이라는 꿈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동맹이 형성되었다.
어느 비 오는 금요일 밤, 그들은 사무실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이 되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빗물이 네온사인을 번지게 했고, 사무실의 형광등은 하나둘 꺼져갔다. 주연은 도윤의 소설 속 주인공이 그리는 장면을 자신의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도윤은 주연이 그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 순간 회사 비상등만이 켜진 어둠 속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키스했다. 엑셀 파일과 기획서 사이에 숨겨두었던 진짜 자신들을 서로에게 온전히 내어준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 주 월요일, 회사는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마케팅팀과 회계팀에서 각각 한 명씩 감원 대상자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의 꿈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마주했다. 회사를 떠나야 할지, 남아야 할지.
발표 전날 밤, 도윤은 주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사랑이 직장을 이길 수 있을까요?" 주연은 미소지었다. "아니, 우리의 꿈이 직장을 이길 수 있을까요?"
다음 날 아침, 사무실 입구에 나란히 붙은 사직서 두 장.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메모가 있었다. "당신이 빛나는 곳에서 만나요." 그들이 매일 지나쳤던 그 형광등 아래서 시작된 사랑은 이제 서로의 빛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