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GG

스트레스사랑

스트레스 사랑법: 무한 루프를 끊다

그날도 어김없이 유진의 폰에는 같은 알람이 울렸다. '약 먹을 시간'. 불과 3년 전만 해도 이런 알람이 필요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불면증은 어느새 그녀의 일상이 되었고, 온갖 약통들이 침대 옆 서랍을 가득 채웠다.

"또 야근이에요." 유진은 문자를 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동이 울렸다. "괜찮아, 내일 보자." 남자친구 민우의 답장은 항상 그랬다. 이해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점점 멀어지는 느낌. 그녀는 약통을 열며 생각했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일까?'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유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칙칙한 얼굴, 생기 없는 눈동자. 몇 번이나 사표를 품에 넣고 왔다가 결국 제출하지 못하고 돌아갔는지 모른다. '이번 달만 더... 다음 달부터는...' 매번 그런 생각으로 버텼다.

점심시간, 선배가 물었다. "유진씨, 요즘 왜 이렇게 야위었어? 스트레스 많아?" 유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곧 적응할 거예요." 적응. 그녀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변명이었다. 스트레스에 적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퇴근길, 유진은 문득 길가의 꽃집 앞에 멈춰 섰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그녀를 반겼다. "뭘 도와드릴까요?" 꽃집 아저씨의 목소리에 유진은 멍하니 대답했다. "제게 줄 꽃을 사려고요."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자신에게 꽃을 선물하는 건 최고의 사랑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유진은 작은 화병에 꽃을 꽂았다. 연보라색 프리지아. 아저씨가 '자기 위로가 필요할 때 좋은 꽃'이라고 추천한 것이다. 그녀는 오랜만에 따뜻한 목욕을 하고, 평소에는 귀찮아서 건너뛰던 스킨케어도 천천히 했다. 약통은 그대로 서랍에 놓아두었다.

다음 날 아침, 유진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사표를 제출했다. 상사의 놀란 표정, 동료들의 속삭임, 그 모든 것이 갑자기 그녀를 짓누르지 않았다. 대신 가벼운 해방감이 그녀를 감쌌다. 점심시간, 그녀는 민우에게 전화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할 얘기가 있어."

카페에서 만난 민우는 평소보다 생기있는 유진의 모습에 놀란 듯했다. "회사 그만뒀어. 그리고..."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우리, 잠시 시간을 갖자." 민우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뜻이야?" 유진은 조용히 대답했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그 전에는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한 달 후, 유진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첫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작은 수입이지만, 밤마다 약을 먹지 않아도 잠이 들었다. 그녀의 침대 옆 서랍은 이제 약통 대신 스케치북과 색연필로 가득했다. 매주 금요일에는 자신에게 꽃을 선물했다. 때로는 외로웠지만, 스트레스의 무한 루프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더 컸다.

어느 날 오후, 유진은 공원 벤치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와 그녀 옆에 앉았다. 민우였다. "요즘 어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진은 미소 지었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 민우는 그녀의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찌든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연작 그림이 있었다. 유진은 펜을 들어 마지막 얼굴에 미소를 더했다. 때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랑의 시작점임을, 그녀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