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om.GG

여친사랑

여친의 흔적, 사랑의 방정식

그녀가 남긴 커피 자국은 탁자 위에서 마르지 않았다. 내가 지워버리길 거부하는 증거,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 마지막 증거였다. 순간의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물질의 흔적은 완강하게 남아있다. 특히 사랑했던 사람의 것들은.

지연이가 내 집을 나간 지 43일째다. 그녀가 마신 커피잔, 그녀가 읽다 만 책, 그녀가 문득 적어놓은 메모지까지. 내 공간은 그녀의 부재로 가득 찼다.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없어서 그녀가 더 존재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단호했다. 내 귓가에 맴도는 그 말은 타이머처럼 매일 울렸다. 내가 왜 그토록 나 자신을 혐오했는지, 왜 그 혐오를 그녀에게까지 번지게 했는지.

방 한구석에 버려진 수학 노트를 집어 들었다. 대학원생인 나는 그녀를 만난 날부터 풀지 못한 방정식을 끄적였다. 복잡한 수식들 사이로 문득 깨달음이 왔다. 미지수 x를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다른 모든 변수를 무시했던 것이다. 마치 내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방정식에서 '나'라는 변수만 집중했던 것처럼.

창문을 열었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틀에 부딪히는 소리가 그녀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우산을 들고 비에 젖은 공원을 걸었다. 여친과 자주 왔던 곳이다. 그날도 비가 왔었다. 서로의 신발이 젖는 것도 모른 채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43일 동안 쓰지 못했던 이메일을 작성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아직 서툴지만, 언젠가 완성된 방정식을 보여드릴게요." 보내기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완성되지 않은 방정식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연히 그녀와 닮은 실루엣을 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달려갈까 망설이다 그대로 서 있었다. 그건 그녀가 아니었다. 대신 내 반사상을 보여주는 카페 유리창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날 밤, 커피 자국을 닦아냈다. 그리고 옷장 깊숙이 숨겨둔 거울을 꺼내 마주했다. 오랫동안 외면했던 나 자신과의 첫 대면이었다. 거울 속 나는 웃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방정식의 첫 번째 변수를 정의하는 순간처럼.

창문 밖으로 비가 그쳤다. 가로등 불빛이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별처럼 빛났다. 여친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은 여전했지만, 그 빈자리에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 그것이 모든 방정식의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