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여친: 스크린과 현실 사이
그녀가 내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건 비 내리는 어느 화요일 저녁이었다. 극장 로비에서 우산을 털던 그녀의 모습은 내가 쓰던 시나리오의 여주인공과 너무나 똑같았다. 검은 단발에 약간 처진 어깨,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불안한 눈빛까지.
"혹시... 여기 혼자세요?" 내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우리는 내가 만든 영화를 함께 봤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렇게 미나는 내 여자친구가 되었다.
사랑에 빠진 영화감독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우리의 첫 키스는 석양이 지는 한강 공원에서, 첫 다툼은 비 내리는 홍대 골목길에서. 모든 순간이 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넌 내가 쓴 시나리오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아." 어느 날 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미나는 웃으며 내 뺨에 키스했다. "그럼 우리 이야기의 결말은 뭐예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시나리오에는 결말이 없었으니까.
영화제 준비로 바빠지면서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미나는 점점 더 예측할 수 없게 변해갔다. 내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는 행동들, 알 수 없는 전화, 설명할 수 없는 부재. 영화 속 인물처럼 완벽하던 그녀가 실제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 두려웠다.
영화제 당일, 내 영화는 대상을 받았지만 미나는 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한 것은 냉장고에 붙은 쪽지 한 장. "당신의 영화는 환상적이지만, 나는 당신의 시나리오대로 살 수 없어요. 언젠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날 밤 난 모든 시나리오를 불태웠다. 그리고 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새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그녀를 찾아서'. 완벽한 여주인공이 아닌, 결점 많고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실제 여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가 개봉한 날, 상영관 맨 뒷자리에 미나가 앉아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더 짧아져 있었고, 내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소는 여전히 같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실과 영화 사이, 우리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