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과 사랑: 이력서에 적지 못한 그 이름
서류 탈락 메일이 도착한 것은 그녀의 생일 자정 정각이었다. 이은수는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며 웃었다. 열 번째 탈락이었다. 완벽한 숫자였다.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자 다음 메일이 보였다. '생일 축하해 은수야.' 발신인은 김태현. 그녀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취준생의 생일 축하는 의미가 없어." 은수는 중얼거리며 소주 캔을 따냈다. 원룸 창문 너머로 서울의 밤이 번쩍이고 있었다. 취업 준비 9개월 차. 그녀의 책상 위에는 면접 질문지와 자기소개서 초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접힌 폴라로이드 한 장. 1년 전 태현과 찍은 사진이었다.
그날 밤, 취기에 젖어 태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11시, 광화문 벤치. 마지막으로 만나자.'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두 가지를 동시에 놓아버리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과 과거의 자신을.
다음날 아침, 은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채로 일어났다. 핸드폰에는 태현의 답장이 있었다. '갈게.'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 자신은 늘 그렇듯 불안해 보였다. 이력서 사진처럼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광화문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가방에서 이력서 한 부를 꺼냈다. 오늘 오후에 있을 면접을 위해 준비해 온 것이었다. '김은수, 27세, 경력 없음.' 차가운 활자들이 그녀를 정의했다. 그때였다.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은수야." 태현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지난 가을과 똑같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내민 것은 하얀 봉투였다. "열어봐."
은수는 봉투를 열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그녀가 지원했던 회사의 명함이 들어있었다. 태현의 이름과 '인사팀 과장'이라는 직함이 선명했다.
"어제... 네 이름이 내 책상 위에 있더라." 태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우리 회사에 지원한 줄 몰랐어."
은수의 손이 떨렸다. "그래서... 내가 탈락한 거야? 우리 관계 때문에?"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은 반대야. 네 서류가 완벽했어. 하지만 내가 심사위원이라는 이유로 네가 불이익을 받을까 봐... 내가 심사에서 빠졌어. 그리고 회사를 그만뒀어."
바람이 불어왔다. 은수의 손에서 이력서가 날아갔지만, 그녀는 잡으려 하지 않았다. 흩날리는 종이 위에 그녀의 과거와 불안이 적혀 있었다.
"오늘 새벽에 네 서류를 다시 제출했어. 내 이름으로." 태현이 말했다. "네 꿈을 응원한다고 적었어. 그리고... 나도 다시 시작하려고."
은수는 처음으로 이력서에 적지 못했던 진실을 깨달았다. 취업은 단지 일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들어가는 용기였다. 그리고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용기였다. 그날 오후, 그녀는 면접장에 들어가면서 태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함께 다시 시작하자. 내 이력서의 빈칸에 너를 채워넣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