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영화관: 방 703호의 비밀
문고리를 돌리자 703호 방의 불이 저절로 켜졌다. 호텔 방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내부는 작은 영화관으로 변해 있었다. 벽은 온통 까만색, 침대 대신 빨간 벨벳 의자 한 줄, 그리고 맞은편 벽은 거대한 스크린이었다. 예약할 때 '특별 체험 룸'이라는 설명만 들었을 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김태현 고객님." 방 안에서 들려온 기계음에 나는 흠칫 놀랐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오늘 밤의 영화는 당신이 선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문이 저절로 닫히고 불이 꺼졌다. 거부할 틈도 없이 스크린에 영상이 나타났다. 희미한 불빛에 의자를 더듬어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화면 속 주인공은... 나였다.
어제 아침, 내가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이었다. 카메라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출근길 커피를 사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도착하는 모습까지. 마치 누군가 하루 종일 나를 미행한 것 같았다. 소리는 없었지만, 내 일상을 담은 무성영화가 고화질로 재생되고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으로 달려갔지만 손잡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문 열어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스크린이 갑자기 정지되었다. 화면에는 내가 한 여자와 대화하는 장면이 멈춰 있었다. 10년 전 헤어진 첫사랑이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어떻게 이런 영상이 있을 수 있지? 그때 나는 핸드폰도 없었고, CCTV도 없는 한적한 공원이었다.
"계속해서 시청하시겠습니까?" 기계음이 다시 들려왔다. "아니면 다른 영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의자로 돌아왔다. "다른 영화요."
스크린이 변했다. 이번에는 내가 기억조차 못하는 장면이었다. 유치원 시절, 모래놀이터에서 노는 어린 내 모습.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가슴이 저려왔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목소리가 떨렸다.
"인생은 영화와 같습니다, 김태현 님. 당신이 까맣게 잊은 장면들,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장면들까지... 모두 여기 있습니다."
영화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미래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모습,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그리고... 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까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703호의 문은 열렸다. 나는 로비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체크아웃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키카드를 올려두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돌아보니 그 건물은 더 이상 호텔이 아니었다. 오래된 영화관이었다. 간판에는 '당신만의 영화관, 일생에 한 번 체험'이라고 쓰여 있었다.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보니 희미하게 글자가 나타났다. "다음 상영 예정작: 선택의 갈림길 - 내일 아침 7시부터 당신의 선택에 따라 상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