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의 재밌는 역설
도서관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그날, 나는 내 삶이 완전히 바뀔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창문 너머로 흐르는 비에 시선을 뺏긴 순간, 책장 사이에서 나온 낯선 초록색 메모지가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당신의 스트레스를 모두 가져가 드립니다. 단, 대가는 있습니다."
황당했지만 호기심이 발동했다. 메모지 뒷면에는 전화번호 한 줄. 그날 밤, 세 번의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걸었다. 기계음이 들리더니 단 한 마디, "승인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정말로 달라져 있었다. 매일 아침 목을 조이던 불안감이 사라졌고, 마감에 쫓기는 압박도, 인간관계의 갈등도, 모든 스트레스가 증발한 듯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릿속 불안 스위치를 꺼놓은 것처럼.
처음엔 천국 같았다. 상사의 비난이 귓등으로 흘러가고, 지하철이 지연되어도 미소가 지어졌다. 심지어 은행 계좌가 텅 비었다는 문자를 받고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게 대가라면 기꺼이 치를 만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첫 징후가 나타났다.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기쁨을 느껴야 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생일에도 축하의 진심이 생겨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던 음식의 맛도, 좋아하던 노래의 선율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스트레스가 사라지자 모든 감정이 중화되었다. 불안과 함께 열정도, 걱정과 함께 기대감도, 압박감과 함께 성취감도 사라졌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도서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였다. 내 앞에 젊은 여학생이 시험공부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트레스 받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동시에... 살아있음이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소중히 여긴다는 증거였다. 내일에 대한 걱정은 꿈이 있다는 증거, 관계의 갈등은 사랑이 있다는 증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성공을 원한다는 증거였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내 스트레스를 돌려주세요." 기계음이 들리고 한 마디, "취소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지각할까봐 식은땀을 흘리며 버스를 쫓아 뛰었다. 그 순간만큼 재밌고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