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와 재회: 잊혀진 약속
출퇴근 지하철에서 고작 스마트폰 화면 하나만 보는데도 눈이 아파왔다. 만성 피로 증후군인지, 번아웃인지, 아니면 그냥 내 인생이 망가진 건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의사는 "스트레스입니다"라는 한마디로 정리했지만, 그것은 마치 숲을 가리켜 "나무가 많네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명백하고 무의미한 진단이었다.
퇴근길,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마저 잡음처럼 들릴 때였다. 지하철 출구 앞 커피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십 년 만에 듣는 그 목소리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정현아, 너 맞지?"
대학 시절 내 첫사랑 유진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을 때면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고, 머리카락은 이제 짧게 잘려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녀와 달리, 나는 온몸의 세포가 모두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우연이네... 잘 지냈어?"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떨렸다.
"그럭저럭. 근데 너 많이 변했다. 얼굴이..." 유진은 망설이다 말을 삼켰다.
"망가졌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야."
유진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가 내 얼어붙은 심장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기억해? 우리 약속."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스트레스 관리 전문가라는 내 직업이 농담처럼 느껴졌다. 남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세요'라고 조언하면서, 정작 나는 과거의 기억조차 봉인해버린 위선자였으니까.
"서른이 되면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 오늘이 네 생일이고, 네가 서른이 된 날이야." 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벚꽃이 흩날리는 캠퍼스에서 나눈 마지막 약속. '서로의 길을 걷다가, 서른에 다시 만나자'는.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유진과의 약속만이 아니었다. 삶을 즐기고, 모험을 하고, 실패해도 웃을 수 있다는 젊은 날의 다짐이었다.
"유진아..." 내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나 지금 너무 지쳤어.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어."
유진은 가방에서 작은 종이 상자를 꺼냈다. 열어보니 열 살 어린 나와 유진의 사진과, 그때 내가 썼던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세계 일주', '소설 쓰기', '영화 찍기'... 모두 미뤄두고 잊었던 꿈들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 다시 시작해볼래?" 유진의 말에 나는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 퇴사 이메일을 보내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여행 계획을 세우며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는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가끔은 길을 잃어야만 진정한 재회가 시작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