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과 여사친: 빛나는 무대 뒤 그림자
뮤직뱅크 1위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관객석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봤다. 여전히 중학교 때처럼 머리를 한쪽으로 묶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스포트라이트가 내 얼굴을 뜨겁게 달구고, 팬들의 함성이 귓가를 가득 채웠지만, 내 시선은 오직 그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지수, 내 유일한 여사친. 아이돌이 되기 전, 내가 그저 '민준'이었을 때부터 내 옆에 있어준 사람.
"오늘 우승을 내 소중한 팬 여러분께 바칩니다!" 내 목소리가 스타디움을 울렸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무대 위 화려함과 달리,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다시 텅 빈 의자에 몸을 맡겼다. 매니저의 메시지가 핸드폰을 진동시켰다. '내일 스케줄 확인해. 그리고 여자 팬과 사적 만남 조심해. 특히 지난번 본 그 여자.'
입술을 깨물었다. 회사는 이미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데뷔 3년차 아이돌에게 '여사친'은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팬들은 내가 모두에게 속하길 원했고, 회사는 그 환상을 팔아 수익을 올렸다.
화장실 거울 속 내 모습은 반짝이는 의상과 완벽한 메이크업 속에서도 공허해 보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수였다.
"축하해, 1위 가수 님. 뒤에서 봤는데 정말 멋있더라."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녀도 안다는 것을. 우리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을. 내 직업이 만든, 내가 선택한 삶이 세운 벽을.
"보고 싶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도. 하지만..."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네가 꿈꾸던 무대잖아. 난 항상 응원할게."
그날 밤, 호텔 방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이돌이라는 꿈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그리고 한 사람과의 진짜 관계를.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걸까?
다음 날 아침, 소속사 대표와의 미팅에서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아, 네 곁에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 이번만 봐주지만, 다음엔 계약 위반이야."
그날 저녁, 오랜만에 지수를 만났다. 한강변 벤치, 모자와 마스크로 위장한 채. 그녀는 내 상황을 이해한다고 했다. "괜찮아, 우린 그냥 친구로 남을 수 있어."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말해주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아이돌의 삶과 진짜 관계 사이에서, 내가 이미 선택을 했다는 것을.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핸드폰에 찍힌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지수와 내가 함께 찍은, 데뷔 전 마지막 셀카. 화면을 넘기자 메시지가 있었다. "빛나는 무대 위에서도, 가끔은 어둠 속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곳이 필요할 거야. 그때까지 난 여기 있을게."
무대 위 환호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은 지수가 작별 인사를 하며 내게 속삭인 말이었다. "진짜 너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이돌 민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