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유튜버의 그림자
구독자 수가 백만을 넘어서는 순간, 하루카의 화면에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비쳤다.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얼굴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지만, 그 눈동자 속에서 춤추는 것은 자신이 아닌 '하루나'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애니메이션 리뷰어 하루나입니다!"
하루카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인사를 마쳤다. 진짜 하루카는 일본어 전공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리뷰하는 채널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유튜브 알고리즘의 총애를 받아 갑작스러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하루나'라는 페르소나가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댓글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하루나 언니 목소리 너무 귀여워요!", "오늘 코스프레도 완전 찰떡이에요!", "역시 일본인이라 애니 해석이 남다르네요!"
하루카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코스프레는 촬영 때만 하는 연기였고, 귀엽다는 목소리는 목을 조이듯 높여 만든 가짜 톤이었다. 구독자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루카가 아닌, 그녀가 창조한 캐릭터 '하루나'였다.
방 한켠에 쌓인 애니메이션 굿즈들은 어느새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하루카는 그것들을 손으로 쓸었다. 차가운 플라스틱 피규어가 손가락에 닿자 현실감이 돌아왔다. 이것들 중 절반은 그녀가 실제로 좋아하는 작품의 것이 아니었다. 구독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리뷰를 위해, 스폰서의 요청으로 구입한 것들이었다.
"내일은 '신의 귀환' 최종화 리뷰야. 감정이 북받쳐 우는 장면을 넣으면 조회수가 더 나올 거야."
하루카는 메모장에 계획을 적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미 최종화를 보았지만, 특별히 감동적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카메라 앞에서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유튜브는 진실보다 '좋은 콘텐츠'를 원했으니까.
어느 날 밤, 편집을 마치고 영상을 업로드한 하루카는 문득 자신의 첫 영상을 찾아보았다. 조회수 100도 채 되지 않는 그 영상에서, 화면 속 여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진심으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발음은 어색했고, 편집은 서툴렀지만, 눈은 반짝였다.
"저기... 진짜 하루카 씨?"
화면 속 여자가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하루카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착각이었다. 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여 영상을 닫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떨려 클릭을 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에 새 알림이 떴다. "하루나 님의 새 영상이 업로드되었습니다." 하루카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방금 업로드를 마쳤는데, 알림은 마치 다른 누군가가 올린 것처럼 느껴졌다.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자, 피부가 아닌 매끄러운 플라스틱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실체가 아닌 피규어가 된 것 같았다.
그날 밤, 하루카는 꿈을 꾸었다. 하루나와 자신이 서로의 몸을 바꾸는 꿈이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녀는 컴퓨터 화면 속에 갇혀 있었다. 화면 바깥, 그녀의 방에는 '하루나'가 새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