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간섭: 내 여사친의 비밀
철수의 카톡이 울린 건 새벽 세 시 정각이었다. "나 오늘 고백했어. 차였어." 민지의 메시지였다. 철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연락은 처음이 아니었다. 여사친 민지가 새로운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상처받고, 철수에게 위로를 구하는 패턴은 이미 다섯 번째였다.
"괜찮아? 어디야?" 철수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은 즉시 왔다. "우리 동네 편의점. 소주 마시고 있어." 철수는 슬리퍼를 꿰신고 후드티를 걸쳤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초겨울 새벽 공기는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철수의 발걸음은 빨랐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민지가 앉아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붉어진 눈가, 반쯤 비워진 소주병. 철수는 옆자리에 앉으며 말없이 민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소주 향과 민지의 샴푸 향이 뒤섞였다.
"이제 정말 연애 포기할래." 민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뭐가 부족한지 모르겠어. 늘 친구로만 좋대. 너처럼."
'너처럼'이란 말에 철수의 가슴이 찌릿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4년째 민지를 좋아했지만, 그녀에게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 민지에게 철수는 그저 '믿을 수 있는 남사친', '항상 곁에 있는 편한 존재'에 불과했다.
"너 진짜 좋은 남자야. 왜 너같은 남자를 못 만나는지 모르겠어." 민지가 철수의 손을 꾹 쥐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철수는 묘한 아픔과 행복을 동시에 느꼈다.
"그 사람도 너의 진가를 몰라서 그래." 철수는 무심코 대답했다.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민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철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사실... 내가 차인 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냥 핑계였어. 네가 나오게 하려고."
철수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네가 좋아." 민지의 말에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근데 네가 내게 그런 감정 없는 줄 알았어. 항상 너무 담담하게 내 연애 상담만 들어주니까... 그래서 오늘은 확인하고 싶었어. 내가 울면 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철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깊고 진한 웃음이었다. 민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4년이야." 철수가 말했다. "4년 동안 네가 다른 남자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어. 근데 여사친으로라도 곁에 있고 싶어서 아무 말도 못했어."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편의점 형광등 불빛이 민지의 눈물방울을 반짝이게 했다. 철수의 손이 민지의 뺨으로 향했다.
"그럼... 우리 이젠 여사친, 남사친이 아닌 거네?" 민지가 수줍게 물었다.
철수는 대답 대신 민지를 품에 안았다. 초겨울 새벽, 편의점 테이블에 반쯤 남은 소주병이 두 사람의 첫 데이트를 지켜봤다. 가끔은 친구라는 선을 건너야만 진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걸, 둘 다 이제야 알게 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