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의 마지막 드라마
회의실 창문에 퍼지는 노을빛 너머로 서울 스카이라인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김주영 대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을 천천히 넘기며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열 시간째 이어진 기획회의였다.
"이거, 방송 나가면 우리 회사 망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회의실 전체에 울렸다. 프로듀서와 작가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츠러들었다.
스튜디오 페닉스의 김주영 대표. 드라마 업계에서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가 손대는 작품마다 최소 20%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그의 까다로운 기준은 업계의 전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세 편의 연속 실패로 회사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대표님," 젊은 작가 하나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은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현실적인 캐릭터, 탄탄한 서사, 지금 시대가 원하는 메시지까지..."
김주영은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회의실의 공기는 커피 향과 긴장감으로 무거웠다. 그의 지친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최선?" 그가 쓰게 웃었다. "최선이라면 내가 여기서 밤새며 당신들 대본을 고치고 있겠나? 시청자는 잔인해. 우리의 '최선'에는 관심 없어. 그들은 단 1분이라도 지루하면 채널을 돌려버린다고."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김주영의 비서가 들어왔다.
"대표님,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난 달부터 시작된 김 대표의 갑작스러운 검진들, 창백해진 안색, 종종 회의 중에 쓰러지던 순간들을.
김주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가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실루엣이 창문에 비친 모습은 마치 자신이 만든 수많은 드라마 속 주인공 같았다.
"여러분,"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이 대본이 우리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군요."
회의실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김주영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없는 동안, 여러분이 만들어갈 드라마가 더 중요해질 겁니다. 내일부터 박지연 PD가 이 프로젝트를 맡습니다."
가장 경험이 적은 막내 PD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김 대표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대표님..." 임원들이 항의했다.
"그녀에게는 제가 없는 시대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 없이 실패할 용기죠."
김주영은 자신의 대본에 빨간 펜으로 마지막 메모를 남겼다. '인생은 드라마처럼 각본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연기해야 한다.'
창밖으로 첫 번째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이 순간도 언젠가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