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의 에스파: 가상과 현실 사이
대표님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사무실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흔들렸다. 내 책상 위의 커피가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였고, 유리창에는 미세한 진동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우리 회사에서는 이미 일상이 된 광경이었으니까.
"또 에스파 모드로 바뀌시네," 옆자리의 정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무슨 콘셉트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블랙맘바 같던데요. 아마도."
우리 대표님은 SM엔터테인먼트의 에스파에 광적으로 빠져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대표님이 자신을 '에스파의 다섯 번째 멤버'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그냥 팬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아바타'가 광야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대형 IT기업의 CEO가 메타버스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대표님의 회의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타났다. 평소의 정장 대신 검은 가죽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다. 눈에는 컬러 렌즈를, 머리는 자주색으로 염색했다. 나이 오십의 중년 남성이 아이돌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광경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우리의 광야 프로젝트 진행 상황은 어떤가?" 대표님이 묻자 회의실이 정적에 빠졌다.
용기를 내어 내가 대답했다. "대표님, 광야는... 실제 기술로 구현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습니다. 메타버스 플랫폼을 개발하는 건 가능하지만, 에스파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것처럼 현실과 완벽히 연동되는 세계는—"
"한계? 한계는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야!" 대표님이 책상을 내리쳤다. "내 아바타가 기다리고 있어. 당신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난 느껴. 광야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를."
그날 밤, 혼자 남아 대표님의 건강 기록을 찾아보았다. 최근 MRI 스캔 결과와 정신과 진단서가 있었다. 측두엽에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환각과 망상을 유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표님은 수술을 거부했다. "내 광야 연결이 끊어질까 봐" 라는 이유였다.
다음 날, 나는 대표님의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자 그는 VR 헤드셋을 쓴 채 춤을 추고 있었다. 현실에선 어색해 보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순수한 기쁨이 있었다. 대표님의 모니터에는 그가 개발팀에 몰래 의뢰한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었다 - 자신을 에스파 멤버들과 함께 춤추게 만든 딥페이크 영상.
그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대표님에게는 현실보다 그 '광야'가 더 의미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의학적으로는 병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었다.
대표님은 춤을 멈추고 나를 발견했다. 헤드셋을 벗으며 창피한 듯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평범한 중년 남성처럼 보였다. "김 부장, 할 말 있나?"
"아닙니다, 대표님." 나는 미소지었다. "그냥... 다음 광야 프로젝트 미팅 시간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현실과 환상 사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광야를 찾아 헤매는 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