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게임: 당신이 플레이하지 않아도 진행되는
"사랑은 게임이 아니야"라고 그녀가 말했던 날, 내 화면에는 '로맨스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알림이 떴다.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미래 사회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지만, 문제는 내가 신청한 적 없는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오류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유미의 기분에 따라 내 시야 한켠에 감정 게이지가 나타났다. 그녀가 웃을 때면 푸른빛으로 채워지고, 불안해할 때면 주황색으로 깜빡였다. 유미와 만날 때마다 시스템은 대화 선택지까지 제안했다. "오늘 머리 바꿨네, 예쁘다"라는 선택지를 고르면 +5점, "요즘 바빠 보여"를 고르면 -2점. 완벽한 로맨스 시뮬레이션 게임이 내 현실에 덧씌워진 것이다.
처음엔 재미있었다. 완벽한 응답으로 유미의 호감도를 높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게이지가 80%를 넘었을 때, 시스템은 '고백 이벤트가 해제되었습니다'라고 알렸다. 그날 밤 한강변, 게임 시스템이 제안한 대로 꽃다발을 건네며 고백했고, 유미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 레벨이 올라갈수록 게임은 더 깊어졌다. 유미의 취향, 그녀가 듣는 음악, 좋아하는 음식, 심지어 그녀가 말하지 않은 트라우마까지 모두 시스템이 알려주었다. 완벽한 연인이 되는 건 그저 지시를 따르는 일에 불과했다.
문제는 3개월 후 시작됐다. "시스템 업데이트: 관계 유지를 위한 일일 미션을 수행하지 않으면 호감도가 감소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선물을 사거나, 메시지를 보내거나, 데이트 코스를 완료해야 했다. 어느 날은 버그가 발생해 유미의 호감도가 갑자기 30%나 떨어졌다.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크게 다퉜다.
"너 요즘 이상해." 유미가 말했다. "마치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진짜 네 마음은 어디 있는 거야?"
그 순간 시스템은 세 가지 응답을 제시했다. 최적의 답변은 "너를 잃을까 봐 두려웠어"였다. 호감도 +15점을 약속했다. 하지만 난 갑자기 지쳤다. 화면 속 선택지가 아닌, 내 진짜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경고음과 함께 '-50점'이라는 텍스트가 깜빡였다. 유미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게임 밖에서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 게임을 끝낼 방법은 없을까? 화면을 스와이프하며 설정을 뒤지던 중 '게임 포기' 버튼을 발견했다. 경고창이 뜨면서 묻는다. "정말로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모든 관계 데이터가 초기화됩니다."
다음 날 아침, 유미를 만났다. 게임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 중이었지만, 더 이상 선택지에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 "유미야,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이번엔 진짜 우리만의 방식으로."
유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시야에서 게임 인터페이스가 깜빡이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메시지는 "진정한 로맨스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였다. 이번엔 규칙도, 점수도, 선택지도 없이—그저 두 사람만의 진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