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로맨스, 한 번의 고백
"어쩌면 사랑은 단 한 번의 고백보다 천 번의 침묵에 더 가까울지도 몰라." 민지는 미대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을 무릎에 올린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가을 나뭇잎들이 그녀의 발치에서 바스락거렸고, 그녀는 맞은편 건물 입구에서 항상 그랬듯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2년 3개월 11일. 민지는 정현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며 스케치해왔다. 그의 눈가에 잡히는 햇살의 각도, 웃을 때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슬픔이 서려있는 뒷모습까지. 스케치북은 어느새 정현으로 가득 찼지만, 그가 민지를 알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그림 그리세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민지는 하마터면 스케치북을 떨어뜨릴 뻔했다. 정현이었다. 그가 정말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민지의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사실... 매일 당신을 그리고 있었어요." 민지의 심장이 귓가에서 쿵쿵거렸다. 이것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고백의 순간이었다.
정현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민지는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넘겼다. 계절이 바뀌며 변화하는 정현의 모습들. 봄에는 가벼운 셔츠를, 여름에는 반팔티를, 가을에는 카디건을, 겨울에는 두꺼운 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이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이게 다... 저인가요?" 정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정현이 스케치북을 천천히 넘기며 말했다. "사실... 저도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민지의 눈이 커졌다.
"매일 이 시간에 여기 앉아계시는 거, 알고 있었어요. 다만..." 정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당신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말을 걸 용기가 없었어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바람이 불어 민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2년 넘게 서로를 알면서도, 첫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던 두 사람. 민지는 스케치북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아직 그리지 않은 빈 페이지였다.
"이 페이지는 우리가 함께 채워볼까요?" 민지가 물었다.
정현은 환하게 웃으며 민지 옆에 앉았다. 가을 햇살이 두 사람 위로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로맨스는 때로 화려한 고백보다, 오랜 시간 서로를 향한 침묵 속에서 더 깊게 자라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