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로맨스
죽음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낯선 이의 손길은 총구보다 더 위험했다. 애슐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 그녀는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낯선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내 이름은 데이비드. 당신을 해치지 않을게요."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졌다. 애슐리의 얼어붙은 몸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폐허가 된 약국 한켠에서 그들은 서로의 호흡 소리만을 들으며 밤을 보냈다. 무너진 천장 틈으로 별빛이 스며들었고, 멀리서 울리는 폭발음은 이상하게도 자장가처럼 들렸다.
"나랑 같이 갈래요?" 다음 날 아침, 데이비드가 물었다. 4년간의 홀로 생존 끝에 애슐리는 처음으로 '함께'라는 단어를 고민했다. 그의 배낭에서 꺼낸 통조림은 그녀가 평생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다. 벽에 기대앉아 나누어 먹는 음식은 마지막 만찬처럼 특별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예요?" 애슐리가 물었다. 데이비드는 잠시 침묵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애슐리는 눈물을 참았다. 세상이 망가진 후로 '사람다움'이란 단어는 사치였다.
그들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 폐허 속에서 그들은 작은 일상을 만들어갔다. 불가능해 보였던 웃음이 다시 찾아왔다. 데이비드는 그녀에게 자신만의 생존 법칙을 가르쳤고, 애슐리는 그에게 옛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켰다. 밤이면 서로의 팔에 안겨 내일을 계획했다. 그것은 로맨스였다. 세상의 종말 속에서 피어난 가장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감정.
"당신이 내 생존의 이유예요." 어느 날 밤, 데이비드가 속삭였다. 그 순간 창밖으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애슐리는 깨달았다. 데이비드가 그녀의 왼쪽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은 칼이었다. 그가 천천히 칼을 뽑았다. "미안해요. 그들이 내 가족을 인질로 잡았어요. 당신의 심장이 필요하대요."
애슐리는 놀랍게도 공포보다 이해가 먼저 밀려왔다. 파괴된 세상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을...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니까. "내가... 사랑한 것은... 진짜였나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데이비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진실된 시간이었어요." 그가 속삭였다. 애슐리는 미소 지었다. 그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진정한 생존은 어쩌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데이비드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밖에서는 그들을 찾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들은 안전했다. 로맨스가 생존의 방식이 된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