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썸타기의 남친 법칙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의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진우는 내 옆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뒤적이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썸'이라는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민지야, 저녁 같이 먹을래?" 그의 목소리는 따뜻한 커피처럼 내 귓가를 간질였다. 대학교 4년 내내 진우와 나는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라는 미묘한 경계선을 걸어왔다. 손끝이 우연히 닿을 때마다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 메시지가 올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두근거림, 그리고 항상 그 직전에서 멈추는 우리의 관계.
"또 술 한잔하고 집에 데려다주기?"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언제나 이랬다. 가까워질 듯 말 듯, 마치 춤을 추듯 다가왔다 물러나곤 했다.
"아니, 오늘은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어."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결연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캠퍼스 뒤 작은 식당에서 우리는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리 사이의 정적을 채웠다.
"사실 나..." 그가 입을 열었다. "남친이 있어."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정확히는 남자친구가 있었어. 대학 오기 전부터 만났던 사람인데, 군대 가기 전까지 연락하지 말자고 했거든. 그런데 이번 주에 제대했어."
내 머릿속에서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함께 밤새 공부했던 도서관,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다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던 밤, 술에 취해 "좋아해"라고 말했다가 다음 날 "농담이었어"라고 웃어넘겼던 그 모든 순간들.
"근데 지금 와서 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람한테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걸 이야기했어. 그리고 깨달았어. 내가 이 '썸'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걸. 누군가와 진짜 관계를 맺는 건 두려운데, 이런 애매한 감정은 편하다고."
웃음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직함이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그래서?"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람과 헤어졌어. 4년 동안 이어온 관계를."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네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
그 순간 깨달았다. 나도 똑같았다는 것을. 확실한 거절보다 애매한 가능성이 주는 안전함에 기대어 살아왔다는 것을. '썸타기'라는 이름의 도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 마음속에서는 폭풍이 일었다.
"진우야, 솔직히 나도 무서워. 네가 내 남친이 된다는 게."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우린 드디어 4년간의 춤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기로 했다. 때로는 가장 두려운 선택이 가장 옳은 선택일 때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진정한 관계는 '썸'이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