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대표님: 현실과 환상 사이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30대 직장인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비현실적으로 커졌고, 머리카락은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파스텔 블루 색으로 하늘거렸다. 대표님이 내게 던진 프로젝트는 단순했다. "애니메이션 세계에 들어가서 시장조사를 해오세요." 그리고 내가 직접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이 장치는 24시간만 효과가 있어요. 그 이상 머물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습니다." 기술팀장의 경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손목시계는 이미 8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세계는 상상 이상이었다. 커피 한 모금에도 분홍빛 하트가 솟아오르고, 놀랄 때마다 내 머리 위로 느낌표가 뿅 하고 나타났다. 처음엔 신기했지만, 곧 이곳의 법칙에 적응했다. 어차피 임무는 단순했다. 이곳의 트렌드를 파악해 우리 회사의 다음 시즌 캐릭터 상품 개발에 반영하는 것.
하코다 카페의 구석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옆자리 캐릭터들은 모두 화려한 액션이나 감동적인 서사 속 주인공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시장조사'라는 평범한 임무를 수행하는 나는 분명 비주류였다.
"혹시... 실제 세계에서 오신 건가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성이 내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는 일반적인 애니 캐릭터보다 훨씬 사실적이었다.
"저도 같은 회사 직원입니다. 3년 전 대표님의 지시로 들어왔죠." 그의 말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돌아가려 했지만... 시간이 다 되어버렸어요. 이제 이곳이 제 세계입니다."
그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애니메이션 세계 지사장 - 김도윤'. 우리 회사의 로고가 선명했다.
"대표님은 매년 새로운 직원을 보내요. 그중 절반은 현실로 돌아가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처럼 여기 남아 지사를 운영하게 됩니다. 이곳의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본사에 보고하는 거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11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선택해야 합니다," 도윤은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에서는 당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어요. 현실에서는 그저 대표님의 지시를 따르는 직원일 뿐이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애니메이션 세계는 화려했다. 슬로우 모션으로 흩날리는 벚꽃, 완벽한 일몰,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들. 내 현실 세계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야근, 각종 보고서, 대표님의 까다로운 지시사항들...
시계를 바라보며 버튼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한 번 누르면 타이머가 멈추고 이곳에 영원히 남게 된다. 누르지 않으면 남은 시간이 지나 자동으로 현실로 돌아간다.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한 걸까. 지금쯤 사무실에서 내가 가져올 보고서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이미 예상하고 있을까.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머뭇거렸다. 이곳에서는 매일이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