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남친, 열여덟의 그림자
열여덟 번째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난 내 남자친구가 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날도 매미 울음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발목을 감싸고, 땀에 젖은 티셔츠는 등에 달라붙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공원에서 그를 기다렸다. 민호는 언제나처럼 10분 늦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진 모습으로 달려오며 미안하다고 말할 때의 그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다림이 값진 것이 되니까.
"시원한 아이스크림 하나 어때요?"
옆자리에 앉은 노인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내게 미소를 지었다. 흰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그는 어딘가 익숙했다.
"할아버지는 민호를 아세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노인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 친구는 자주 오나요?"
"네, 우리는 여기서 매주 만나요. 오늘은 우리 100일이에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 일이라... 참 좋은 시간이군요. 나도 젊었을 때 이 벤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민호의 메시지였다. '미안,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급한 일이 생겼어.'
실망감이 밀려왔다. 100일인데. 노인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부드럽게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안 온다면, 그냥 혼자 산책이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저 길을 따라가면 예쁜 연못이 있어요."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으면서 문득 깨달았다. 민호와 함께 걸은 적이 없는 길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같은 벤치, 같은 아이스크림 가게, 같은 영화관만 가곤 했다. 그리고... 민호를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연못에 도착했을 때, 햇빛이 물 위에서 반짝였다. 물 위에 비친 내 모습은 외롭지만 또렷했다. 민호와 찍은 사진을 휴대폰에서 꺼내 보았다. 모든 사진은 내가 혼자 찍은 셀카였다. 민호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다.
벤치로 돌아왔을 때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대신 낡은 일기장 한 권이 놓여 있었다. 1973년, 열여덟 살 소녀의 일기였다.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민호를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친구...'
47년 전 여름, 그리고 지금의 여름. 두 개의 환상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석양이 연못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일기장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다음 여름, 또 다른 누군가가 이 벤치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기다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