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의 맛집: 너를 그리워하는 맛
그녀가 남긴 맛집 리스트를 들여다보는 건, 마치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은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미현이 떠난 지 정확히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먼저 찾은 맛집은 네 것이 될 수 없어."
그때는 그저 황당한 이유라고만 생각했다. 3년 연애가 '맛집 소유권'으로 끝난다니. 하지만 미현의 휴대폰에 남겨진 맛집 리스트를 보며 나는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맛집은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었다. 각각의 장소에는 그녀가 소중히 간직했던 기억의 맛이 배어 있었다.
'강남 골목안 파스타 - 비 오는 날 꼭 가볼 것. 창가 자리에서 빗방울 보며 까르보나라 먹기.'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그날도 비가 내렸고, 우연히 같은 테이블을 쓰게 된 우리는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대학로 숨은 찻집 - 얼그레이 티라미수 꼭 주문할 것. 따뜻한 홍차와 함께.'
첫 키스를 했던 곳. 티라미수의 달콤함보다 더 달콤했던 그녀의 입술 맛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있다.
리스트를 내려갈수록 가슴이 조여왔다. 이것은 단순한 맛집 목록이 아니었다. 우리의 연애 지도였다. 미현은 맛으로 기억을 저장했고, 나는 그저 배를 채우는 것으로만 여겼다.
'을지로 골목 이자카야 - 일요일 저녁에만 가기. 사케 한 잔과 함께하는 일주일의 마무리.'
그곳에서 우리는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털어냈다. 어깨에 기대 잠든 미현의 얼굴이 그토록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한강공원 근처 분식집 - 떡볶이에 치즈 추가해서 주문할 것. 텀블러에 소주 몰래 가져가기.'
마지막 리스트 항목 아래 미현의 메모가 있었다.
'이 맛집들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었는데, 정작 너는 그곳에서 맛보다 나를 보지 못했어.'
갑자기 미현이 왜 '맛집 소유권'을 운운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녀에게 맛집은 우리의 추억을 간직한 장소였고, 나는 그저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만 여겼다. 그녀는 맛으로 사랑을 기억했지만, 나는 그 사랑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오늘, 미현이 떠난 지 100일째 되는 날, 나는 그녀의 맛집 리스트 첫 번째 장소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강남의 파스타 집. 창가 자리에 앉아 까르보나라를 주문했다. 첫 입을 베어 물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파스타 맛이 아니라, 미현과 함께했던 그날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 진정한 맛집은 음식의 맛이 아니라, 함께한 사람과의 추억이 만들어내는 그리움의 맛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