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행에서 찾은 진짜 남친
난 여행 가방을 다 꾸리고 난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면, 내일이면 나는 혼자 오랫동안 꿈꿔왔던 유럽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4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저기... 진우씨 여자친구 맞으세요? 제가... 진우씨랑 3개월째 만나고 있어요."
그렇게 내 여행은 시작됐다.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여행 가방에 담긴 물건들은 그대로였지만, 내 마음속에 담긴 것들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배신감, 분노, 슬픔, 그리고 묘한 해방감까지.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비행기에 올랐다.
프라하의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내 발자국 소리에 집중했다. 돌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그 소리는 내가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내 삶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지만, 나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세 번째 날, 나는 작은 카페에서 우연히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도움을 건넸다. 민수라는 그 남자는 친구들과 함께 왔다가 따로 여행 중이라고 했다.
"여행은 때로 혼자일 때 더 의미 있잖아요. 자신을 찾는 시간이니까요."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저는 제 남친을 잃은 후에야 여행을 시작했네요."
우리는 그날부터 함께 다녔다. 초면에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이상한 여자와, 낯선 도시에서 길을 헤매던 남자. 서로에게 의지하면서도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열흘간의 여행이 끝날 무렵, 나는 깨달았다. 내가 4년 동안 함께했던 남자친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이상적인 이미지였다는 것을. 나는 그를 온전히 보지 못했고, 그래서 배신당했을 때 그토록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민수는 내게 연락처를 물었다.
"이거,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가끔 연락하면서 서로의 여행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공유하고 싶어서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여행은 이제 끝났어요. 하지만 진짜 여정은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때로는 사랑을 잃어야만 자신을 찾게 되고,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익숙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 여행 가방은 출발할 때보다 무거워졌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어쩌면 진정한 남자친구란, 함께 있을 때 나를 나답게 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전에, 나는 먼저 나 자신과 친구가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