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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짝사랑

여행으로 피어난 짝사랑

열차가 굽이치는 산길을 돌아 나올 때, 그녀의 머리카락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였다. 나는 그 찰나를 평생 기억할 것이다.

백팩투어의 마지막 날, 부다페스트에서 프라하로 향하는 열차 안. 8인실 객실에 나와 그녀가 마주 앉았다. 여행 내내 같은 호스텔에 묵었지만, 용기가 없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저 아침마다 로비에서 마주치는 미소와 고개 끄덕임만이 우리의 대화였다.

"혹시 이거 읽어봤어요?" 그녀가 문득 내게 건넨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책표지가 닳아 있었고, 여러 페이지에 접힌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의 사랑받은 책은 그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이 작가 좋아해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창밖으로 헝가리의 시골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노란 들판과 붉은 지붕의 집들. 그녀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으로 화제를 옮겼다. 서울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번아웃이 와서 떠난 여행이라고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했다. 졸업 후 취직 대신 선택한 유럽 여행,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출 때마다 나는 말을 잃었다. 눈가의 작은 주름,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이야기할 때 자주 만지작거리는 목걸이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프라하에서 뭐 볼 계획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같이 다녀볼래요? 저도 혼자라서..."

프라하의 첫날, 우리는 까를교를 걸었다. 둘째 날엔 프라하성을, 셋째 날엔 구시가지 광장을 함께했다.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고, 그녀는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저녁엔 지역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나는 매일 밤 그녀에게 고백할 용기를 내려 했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여행 일정은 프라하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베를린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헤어지기 전날 밤, 우리는 블타바 강가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해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다.

"나... 사실..."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나 내일 돌아가. 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 누군가를 향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은 그녀가 말했다. "남자친구예요.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순간 밤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당연하지. 이런 완벽한 사람이 혼자일 리 없잖아.

다음 날 공항에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서로의 연락처도 교환했다. 언젠가 서울에서 만나자는 형식적인 약속과 함께.

지금도 가끔 그녀가 내게 건넸던 책을 펼쳐본다. 그 페이지 사이에서 프라하의 밤공기와 블타바 강의 물결 소리, 그리고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여행은 끝났지만, 내 짝사랑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