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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보드게임

영상으로 전달된 보드게임의 유산

창문을 타고 내려오는 빗방울처럼 화면 속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가락이 체스 말을 움직였다. 내가 유일하게 소유한 할아버지의 영상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병상에서 그가 내게 남긴 것은 낡은 보드게임 하나와 영상 파일이 담긴 USB였다.

"이 USB를 본 후에만 상자를 열어라."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영상 속에서 할아버지는 체스판에 말을 세팅하고 있었다. 호스피스 병실의 창백한 조명 아래, 그의 뼈만 남은 손가락이 말들을 정확히 제자리에 놓는 모습이 화면에 담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빗소리가 들렸고, 심전도 기계의 규칙적인 비프음이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왔다.

"민재야, 이 체스는 내가 6.25 전쟁 중에 만든 것이다. 나무 조각을 깎아서..."

화면 속 할아버지는 갑자기 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체스 판의 양쪽 진영을 모두 조작하기 시작했다. 마치 혼자서 게임을 하는 것처럼. 그의 움직임에는 패턴이 있었다. 특정 말들이 특정 위치로 이동했다.

"이 게임은 단순한 보드게임이 아니야. 이건 코드야. 내가 남북으로 갈라진 가족들에게 전하던 암호문이었지."

영상은 35분 동안 계속되었다. 할아버지는 정확히 43번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각 말의 이동이 알파벳 하나, 또는 숫자 하나를 의미한다고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노트에 모든 것을 기록했다.

영상이 끝나갈 무렵,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상자를 열어봐라. 안에는 네 할머니가 북에 두고 온 너의 삼촌에게 쓴 편지가 있다. 그리고... 그 삼촌의 아들, 네 사촌의 주소도."

내 손이 떨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나는 그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상자를 열지 못했던 것이다. 암호를 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결심했다. 먼지 쌓인 상자를 꺼내 할아버지의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보드게임 위에서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따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눈앞에 숫자와 문자들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암호가 풀렸을 때, 나는 이해했다. 이것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 분단과 이별, 그리고 약속의 코드였다. 할아버지는 평생 이 보드게임을 통해 북에 있는 가족들과 소통하려 했던 것이다.

상자를 열었을 때, 내가 발견한 것은 낡은 편지 한 장과 함께 평양의 주소, 그리고 작은 노트였다. 노트에는 할아버지의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내가 떠난 지금, 이 암호의 열쇠는 너에게 있다. 네가 이어가야 할 대화가 있다."

창밖으로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내 손 안에는 70년 동안 전하지 못한 메시지를 담은 보드게임이 있었고, 화면 속에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마지막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