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남친: 그가 내게 필요 없어지는 순간
처음 내 책상 위에 자기계발서가 쌓이기 시작했을 때, 현우는 내가 잠시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가가 '성공', '습관', '마인드셋'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 지 석 달째, 그의 표정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정아야, 이번 주말에는 좀 쉬는 게 어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그거 읽고..." 현우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지만, 내 귀에는 방해로만 들렸다. 하루에 열 시간씩 공부하는 나에게 '쉼'을 권하는 그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내 삶의 로드맵에서 그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7개월 전, 대기업 면접에서 떨어진 후 우연히 집어든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90일'이란 책은 마치 마법처럼 내 인생을 뒤흔들었다. 매일 아침 5시 기상, 30분 명상, 1시간 운동, 4시간 전공 공부, 3시간 영어 공부. 빽빽한 일정 속에서 현우와의 데이트는 '비생산적 시간'으로 분류되었다.
"너 요즘 많이 변했어."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현우가 말했다. 평소라면 그의 기분을 살폈을 나였지만, 그날 내 머릿속에는 다음 날 읽어야 할 챕터만이 가득했다. '관계 관리도 자기계발의 일부'라는 책의 구절이 스쳐 지나갔지만, 현우의 쓸쓸한 표정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가 떠난 날은 이상하게도 비가 오지 않았다. 드라마 같은 이별 장면도 없었다. 그저 "너의 계획에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라는 문자 한 통이 전부였다. 창밖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왔고, 나는 잠시 멍하니 울적해졌다가 곧 '성공한 사람들의 아침 습관' 책을 펼쳤다.
취업 합격 통지를 받은 건 이별 후 정확히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희망하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은 중견기업이었다. 같은 날 저녁,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블로그에 써온 자기계발 일기가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했다. 마치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 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 일기장에 빼곡히 적힌 목표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체크되지 않은 항목을 발견했다. '행복하기'. 갑자기 현우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고, 그와 함께했던 무의미한 시간들—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던 한강,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로 뛰어다니던 골목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출간 계약서를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망설였다. 내가 이토록 열심히 쌓아온 자기계발의 탑 꼭대기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저 더 높은 탑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뿐이었다. 현우가 내게 보여주려 했던 것은 그 탑 바깥의 세상이었을까?
다음 날 아침, 처음으로 알람을 끄고 두 시간을 더 잤다.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자기계발서를 모두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키득키득 웃으며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핸드폰에는 반년 만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현우였다. "잘 지내?"라는 질문에, 나는 처음으로 계획 없이 대답했다. "아니, 네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