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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대표님

짝사랑의 계단: 대표님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

열두 번째 사내 메일을 지우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지 깨달았다. 대표님께 보낼 용기도, 아예 포기할 결단력도 없었다. 커서가 깜빡이는 빈 화면만이 소연의 마음처럼 공허했다.

"김소연 대리, 오늘 마케팅 보고서 준비됐나요?" 정대표의 목소리에 소연은 화들짝 놀라 모니터를 껐다. 그의 향수 냄새가 사무실의 건조한 공기를 가르며 그녀의 코끝에 닿았다. 메탈릭한 애프터쉐이브 향과 묘하게 섞인 따뜻한 체취. 소연은 그 냄새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네, 대표님. 방금 마무리 중이었습니다." 소연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전문적이고 담담했다. 세 달째 이어진 짝사랑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다.

정대표는 소연의 모니터를 향해 몸을 숙였다. "보여주세요." 그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가리키며 소연의 손에 스쳤다. 순간적인 접촉에 소연의 뺨이 붉어졌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화면에 집중할 뿐이었다.

회의실에서 소연은 프로젝터에 보고서를 띄우며 떨리는 손을 감추려 애썼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정대표의 옆모습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그의 단단한 턱선과 깊은 눈매가 소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표를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그에게로 향했다.

"이번 캠페인은 소연 대리 덕분에 성공적이었습니다." 정대표의 칭찬에 회의실이 떠들썩해졌다. 소연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쓸쓸함이 숨어있었다. 그가 보는 그녀는 오직 유능한 직원일 뿐이었다.

퇴근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로비에서 소연은 우산을 꺼내들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방향이면 태워드릴까요?" 정대표였다. 그의 차 안에서, 빗소리를 배경으로 침묵이 흘렀다. 소연은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릴까 두려웠다.

"회사에서 보는 것과 달리, 사적인 자리에서는 참 조용하시네요." 정대표의 말에 소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할... 말이 많아서 그래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래요? 무슨 말인데요?" 빨간 신호등 앞에 차가 멈췄다. 소연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결국 말하지 못할 감정이라면, 적어도 그 무게는 덜어내야 했다.

"대표님... 저..." 소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대표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 지금 가는 중이야. 응, 알았어." 소연의 마음이 얼어붙었다. 그가 반지 낀 손으로 핸들을 쥐는 모습이 이제야 보였다.

집 앞에 내려주며 정대표는 미소지었다. "아까 하실 말씀은요?"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보고서 칭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거예요." 문을 닫으며 소연은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봤다. 짝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끝나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아무리 올라가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소연은 열세 번째 메일을 영구 삭제했다. 그리고 새로운 보고서를 시작했다. 창밖으로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보였다. 적어도 오늘은, 그녀는 자신의 마음도 같은 방향으로 정리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