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의 보드게임: 승리보다 중요한 것
다섯 번째 금요일 게임 밤, 내가 진 건 단순한 보드게임만이 아니었다. 민서가 웃을 때마다 내 심장은 주사위보다 더 요란하게 구르고 있었다.
"윤재야, 네 차례야. 집중 좀 해!"
민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테이블 위에는 알록달록한 게임 말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고, 손가락으로 보드를 두드리는 민서의 빨간 매니큐어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커피와 과자 냄새가 보드게임 카페를 가득 채웠다. 우리 넷은 매주 이렇게 모였다. 수진, 경호, 민서, 그리고 나. 하지만 오직 나만 이 자리가 단순한 게임 모임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저번에도 졌으니까 이번엔 이겨야 하는데," 민서가 주사위를 굴리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보드 위를 움직일 때마다 내 시선은 자석처럼 따라갔다. 3년째 이어지는 짝사랑. 말하지 못한 감정은 게임 말처럼 정해진 경로만 맴돌았다.
"우리 이번에 새 게임 할까?" 수진이 제안했다. "러브레터라고, 완전 핫하대."
경호가 웃었다. "러브레터? 그게 뭔데?"
"상대방에게 편지를 전달해서 마음을 얻는 게임이래. 윤재 같은 소심남들한테 딱이지."
모두가 웃었지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카드를 섞으며 수진이 속삭였다. "오늘은 말해봐. 평생 말 못할 거야?"
러브레터 게임은 의외로 간단했다. 각자 카드를 뽑아 전략적으로 플레이하며 공주의 마음을 얻는 게임. 하지만 내게는 현실의 반영처럼 느껴졌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실패하는 고백 같은.
"윤재, 넌 왜 항상 그렇게 안전한 선택만 해?" 민서가 내 카드 선택을 보며 물었다. "가끔은 모험을 해봐야지."
그녀의 말에 무언가 꽉 막혔던 가슴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라운드, 나는 평소와 달리 가장 위험한 카드를 선택했다. 테이블 주위가 조용해졌다.
"와, 윤재가 이겼어!" 경호가 소리쳤다.
민서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오늘 왜 이래? 평소 같지 않게 대담한데?"
그 순간이었다.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민서야,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게임 끝나고 잠깐 시간 될까?"
수진과 경호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먼저 갈게. 담에 봐~"
카페 창가에 남은 우리 둘. 무언가 말해야 했지만, 준비했던 말들이 모두 증발해버렸다.
"사실 알고 있었어." 민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거."
"어떻게..."
"보드게임에서 네가 항상 나를 공격하지 않는 거, 내가 이기면 누구보다 기뻐하는 거, 그리고..." 그녀가 웃었다. "수진이 다 말해줬어."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민서가 내 손을 잡았다.
"근데 왜 말하지 않았어? 이렇게 오래?"
"네가... 거절할까봐."
민서는 한숨을 쉬었다. "인생은 보드게임이 아니야, 윤재야. 항상 안전한 길만 택하면 가장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돼."
"그럼 지금..."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난 네가 모험을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어." 민서의 눈이 반짝였다.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은 규칙이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니까."
그날 밤, 우리는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다. 짝사랑이라는 솔로 플레이가 끝나고, 둘이서 함께하는 새로운 보드가 펼쳐졌다. 때로는 주사위를 굴려도 원하는 숫자가 나오지 않겠지만, 중요한 건 게임을 계속한다는 것. 민서의 손을 잡으며 깨달았다 - 진정한 승리는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할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