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화장품: 청춘의 색조
교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노란 오후 햇살이 내 화장품 파우치의 반짝이는 지퍼를 비추었다.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지만, 내 주의는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윤서야, 너 또 수업 시간에 화장하다 걸렸어?" 혜진이 내 옆에서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서랍 속으로 파우치를 밀어 넣었다. 벚꽃색 립스틱 자국이 남은 손등을 몰래 닦았다.
고3이 된 지 석 달째, 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엔 모범생, 화장실에선 화장품 마케터. 인스타그램에 올린 '10분 완성 교복 메이크업' 튜토리얼이 우연히 입소문을 타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지금은 팔로워 2만 명, 화장품 브랜드에서 협찬도 들어오는 '학생 인플루언서'가 되어 있었다.
"너희들은 공부할 나이에 화장이 웬 말이냐!" 교장 선생님의 조회 훈화가 귀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점심시간마다 3학년 여자 화장실은 색조 화장품의 전시장으로 변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 주변에는 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윤서야, 이번에 새로 나온 틴트 어때? 정말 교복에 잘 어울린다며?"
"야, 민지한테 빌린 파우더 어디 있어? 피부과 약 바르고 있어서 톤 차이 심하게 나는데..."
화장품은 우리의 비밀 언어였다. 수식과 공식 사이에 질식할 것 같은 하루에 선명한 색을 입히는 작은 자유. 기말고사 성적표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틴트 색상이었고, 대학 입시보다 다급한 건 다 쓴 마스카라를 교체하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학교 블로그에 '화장품 소지 및 화장 금지' 공지가 올라왔다. 교실 뒷문에서 교감 선생님과 생활지도부장이 가방 검사를 진행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밤, 나는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을 남겼다.
"내일부터 #학교화장품_압수반대 해시태그로 함께해요."
다음 날 아침, 교문 앞에서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평소보다 진한 화장을 하고 등교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입술과 볼, 반짝이는 눈매가 아침 햇살 속에서 춤추었다. 교복 주머니마다 립스틱 한 개씩을 넣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가방 검사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내밀었다. 생활지도부장은 내 파우치를 열어 화장품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냐?"
그때였다. 교실 뒤에서 한 여학생이 일어나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당당히 바르기 시작했다. 다른 여학생이 그 뒤를 따랐고, 순식간에 교실 전체가 화장품을 꺼내 드는 모습으로 가득 찼다.
그날 오후, 학생회실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교장 선생님, 학생회장,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화장은 자신감이 아니라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일 뿐이다"라는 교장 선생님과 "화장은 우리의 자기표현이며 정체성"이라는 학생 대표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타협안이 나왔다.
한 달 후, 학교 매점 한쪽에 작은 '청소년 화장품 코너'가 생겼다.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고, 수익금은 장학금으로 쓰인다. 교복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제품만 판매한다는 조건이었다. 코너 한쪽에는 작은 거울과 함께 문구가 적혀 있다.
"네가 그리는 미래의 색은 네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도 점심시간이면 그곳에 모여 서로의 꿈과 고민을 나누는 여학생들. 입시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작은 립스틱 하나로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창가의 햇살처럼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