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드라마: 마지막 출근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라는 사실을 나만 알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 형광등 불빛이 내 얼굴을 비추었고, 평소와 다름없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프린터의 윙윙거림이 귓가를 채웠다. 20년간 매일 아침 반복된 이 일상이 오늘로 끝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김부장님,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항상 밝게 인사하는 이 대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그녀의 얼굴에 맺힌 미소 주름까지 오늘따라 또렷했다. 커피 향이 사무실을 감싸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분주함 속에 빛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여왔다.
퇴직까지 딱 하루. 어제 의사는 내게 3개월의 시간이 남았다고 했다. 암이 너무 많이 퍼져서 수술도 무의미하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20년을 함께한 동료들에게 가벼운 작별 인사만 건네고 떠나기로. 그것이 내가 선택한 마지막 드라마의 시나리오였다.
"오늘 퇴근 후에 우리 팀 회식 있어요. 꼭 참석하셔야 해요." 박 과장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서류들은 내일 다른 누군가가 처리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평소와 같았다. 20년간 매일 먹던 된장찌개를 주문했다. 평소엔 무심코 넘겼던 된장의 구수한 향과 따뜻한 밥의 감촉이 오늘따라 특별하게 느껴졌다. 테이블 너머로 보이는 동료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마치 소중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오후 회의에서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여 내 의견을 말했다. 항상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동료들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작은 용기가 왜 지금에서야 나오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퇴근 시간, 짐을 챙기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 낡은 커피잔, 메모지에 적힌 휘갈겨 쓴 글씨들까지. 모든 것이 내 인생의 한 조각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서랍 속 작은 편지들을 꺼내 각자의 책상에 남겼다. 내일이면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그들을 소중히 여겼는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생각했다. 인생이란 것이 사무실 드라마처럼 매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흘러가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감정과 관계의 드라마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마지막 출근을 마치고 회사 건물을 나서는 순간,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적시듯이.
회식 장소로 향하는 길,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어쩌면 이게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모레도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는 출근을 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될 테니까. 내가 없는 사무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오늘의 마지막 출근을 영원히 간직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