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여행: 부서진 체스판 위의 방랑자
체스판 위에서 망명자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규칙적인 흑백 격자 위에 갇혀 살던 내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이 체스판을 벗어나지 못하겠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왔을 때, 나는 말이 되기를 포기했다.
"이제 그만 둡시다." 내가 체스 상대에게 말하자 친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불편했는지, 친구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한 판만 더 하자. 너 항상 이렇잖아. 한 번도 끝까지 완주한 적 없어."
소박한 카페의 창가 자리. 체스판의 나무 모서리가 손때로 반들거렸다. 창밖으론 낯선 도시의 골목길이 보였다. 보드게임을 들고 떠난 이 여행은 '현실 도피'라는 친구들의 조롱 섞인 말과 함께 시작됐다. 내 인생은 언제부터인가 백지 위에 그려진 게임 보드처럼 누군가 정해놓은 선 위에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알잖아, 체스는 널 위한 게임이 아니야. 넌 항상 정해진 길을 거부하는 사람이었어." 친구가 킹을 손가락으로 툭 쓰러뜨렸다. 나이트의 L자 움직임, 비숍의 대각선, 룩의, 퀸의... 모두 정해진 운명대로만 움직인다. 그 안에서의 자유란 허상에 불과했다.
나는 가방에서 다른 게임을 꺼냈다. 접었다 펼 수 있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지도 같은 보드였다. '인생 게임'이라고 적힌 오래된 보드게임. 유년 시절 가족들과 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건 뭐야?" 친구가 물었다.
"진짜 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마지막 게임." 내가 답했다. 주사위를 굴리자 '6'이 나왔다.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보드판 위 작은 피규어가 인생의 굴곡진 길을 따라 움직였다. 결혼, 취직, 퇴직, 여행... 삶의 모든 순간이 단순한 칸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친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이것도 정해진 길이잖아. 네가 그토록 싫어하던."
나는 말없이 게임 보드를 접었다. 그리고 내 차례에 주사위를 던지는 대신, 피규어를 집어 보드 밖으로 옮겼다.
"규칙 위반이야," 친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니, 이게 진짜 게임의 시작이야."
다음날 아침, 나는 짐을 모두 챙겨 친구에게 쪽지 하나만 남기고 떠났다. '나만의 보드게임을 만들러 갑니다.' 미리 계획했던 여행이 아니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따라, 정해진 규칙도 없이, 그저 내 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여행. 이건 도피가 아니라 발견의 여정이었다.
어느 작은 마을의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던 중, 가방 구석에서 체스의 킹 조각 하나가 나왔다. 언제 넣었는지도 모르는 그 말을 창문 틈새에 세웠다. 해 질 녘 빛에 비친 그림자가 창 너머 미지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면 체스판 위의 모든 말들은 자신만의 여행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