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드라마: 우리가 보지 못한 이야기
찬바람이 불던 저녁, 어머니의 서랍에서 오래된 VHS 테이프 하나를 발견했다. 라벨에는 희미한 글씨로 '우리의 드라마, 1992'라고 적혀 있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먼지 쌓인 비디오 플레이어를 찾아 연결했다. 화면이 깜빡이며 나타난 것은 20대 초반의 부모님이었다.
"오늘은 강희와 정훈의 첫 만남을 연기해볼게요. 자, 액션!"
카메라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따라 젊은 부모님은 어색한 연기를 시작했다. 내가 알던 엄마는 항상 감정 표현에 인색했고, 아빠는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그러나 화면 속 그들은 달랐다. 엄마는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고, 아빠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대사를 읊고 있었다.
"대학 연극 동아리였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테이프는 계속 재생되었고, 나는 부모님의 숨겨진 열정을 목격했다. 그들이 연기한 드라마는 미완성 시나리오로, 두 젊은이가 사회적 편견에 맞서 꿈을 찾아가는 내용이었다. 아빠가 누군가에게 "언젠가 우리 이야기를 완성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테이프는 갑자기 끊겼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귀가한 부모님을 향해 테이프에 관해 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건... 우리의 꿈이었단다." 아빠가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와 네 엄마는 극작가와 배우를 꿈꿨어. 그 드라마는 우리가 함께 쓴 첫 작품이었지."
"그런데 네가 생기고, 생활이 팍팍해지면서..."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부모님은 내 대학 등록금을 위해 꿈을 접었다고 했다. 엄마의 회계 사무실, 아빠의 보험설계사 일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나를 위한 희생이었다.
그날 밤 늦게, 나는 부모님 방 앞에서 낮은 대화 소리를 들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들은 오래된 대본을 펼쳐 놓고 서로의 대사를 나지막이 읽고 있었다. 엄마의 눈가에는 반짝임이, 아빠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연극학과 교수님을 찾아갔다. 부모님의 미완성 드라마 대본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의 삶에 가려져 있던 청춘의 열정을 되살리고 싶었다.
몇 달 후, 대학 축제 마지막 날, 작은 야외무대에 부모님을 모셨다. 커튼이 올라가고 무대 위에서 "강희와 정훈의 이야기"라는 자막이 올라갔을 때, 객석에서 엄마의 놀란 탄성이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두 주인공이 꿈을 이루는 순간에 부모님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눈에는 오래전 VHS 테이프 속 청춘의 빛이 다시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