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행, 부모님을 돌아보다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날, 서랍 속에서 낡은 여행 계획서가 발견됐다. 고작 A4용지 한 장에 담긴 부모님의 꿈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것들이었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이라는 제목 아래 열 개의 장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단 한 곳에도 체크 표시가 없었다.
창밖으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시던 것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책 읽는 게 내 여행이야." 아버지는 언제나 그 말에 웃으며 "우리 언젠가는 진짜 여행 가자"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았다.
손끝으로 종이를 쓸어내리자 먼지가 일었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 대학 등록금을 위해, 우리 집 대출금을 갚기 위해, 항상 '나중에'라는 말로 자신들의 꿈을 미뤄왔다. 어쩌면 그들에게 '나중에'란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머니의 빨간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는 찻잔, 아버지의 담배 냄새가 배어있는 재킷, 그들이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 속 웃음 뒤에 숨겨진 꿈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들은 결코 호소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여행 계획서는 단 한 번도 내게 보여진 적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부모님의 리스트에 있는 모든 장소를 대신 방문하기로. 첫 번째 목적지는 산토리니였다. 어머니가 항상 푸른 에게해와 하얀 집들을 그리워했던 그곳. 비행기에 오르며 내 손에는 부모님의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이아 마을의 절벽 위, 석양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순간이었다. 바람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내 뺨을 쓰다듬었고, 파도 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따뜻하게 울려 퍼졌다. 부모님의 사진을 꺼내 석양을 배경으로 들어올렸다. "여기 왔어요, 부모님. 마침내 여행 왔어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아마도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던 '언젠가의 여행'이 마침내 실현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나는 리스트에 있는 첫 번째 장소에 체크 표시를 했다. 아홉 곳이 더 남았다. 부모님이 평생 미뤄온 여행을, 이제 내가 그들을 대신해 떠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부모님이 내게 준 무한한 사랑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