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남사친: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들
그날 밤, 민수의 문자를 받았을 때 이미 시계는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 나올 수 있어? 중요한 얘기가 있어." 십 년 지기 남사친의 문자치고는 너무 무거웠다.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는 관계였지만, 이렇게 급박한 연락은 처음이었다.
한강 공원 벤치에 도착했을 때, 민수는 이미 와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여름 밤공기는 촉촉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체인 돌아가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트렸다. 그의 옆에 앉자 익숙한 샌달우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열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얼굴인데,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내일 떠나. 미국으로."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장난기 많은 민수답게 또 무슨 농담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부모님도 몰라. 너만 알고 있어." 그제서야 그의 손등에 난 상처들과 며칠째 학교에 오지 않았던 이유가 연결되었다.
"왜?" 내 질문에 민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 익숙한 동작이 아마도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또 그러셨어. 이번엔 병원에 실려 갔어야 했어." 민수의 가정폭력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의 상처들. 나는 언제나 민수의 도피처였고, 그는 내 삶의 안전한 피난처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나가서 일단 버텨볼 거야. 돌아올지도 모르겠어." 그의 말에 한강의 물결이 더 거세게 느껴졌다. 십 년의 우정이 한순간에 대서양을 두고 펼쳐질 거라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같이 가."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민수도, 나도 놀랐다. "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대학, 가족, 꿈... 모든 것을 두고 떠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민수 없는 내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민수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은 차갑고 떨리고 있었다. "나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항상. 근데 남사친으로 남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십 년간 가장 철저히 지켜온 비밀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서로에 대한 감정이었다. 친구라는 가면 뒤에 숨겨둔 마음이었다.
"내일 아침 여섯 시 비행기야." 민수가 일어서며 말했다. 한강의 야경이 그의 눈에 반사되어 별처럼 빛났다. "공항까지는 같이 가지 마. 너무 힘들 것 같아." 그리고는 내게 작은 봉투를 건넸다. "비행기에서 열어봐줘."
다음 날 아침, 나는 공항에 있었다. 그의 부탁을 어기고. 손에는 여권과 급하게 챙긴 작은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봉투 안에는 두 장의 비행기 티켓이 있었다. 하나는 그의 것, 하나는 내 이름으로 된 것. 우리의 가장 큰 비밀은, 어쩌면 항상 서로를 향해 있었던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대로 행동할 용기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