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사진 속 남사친
그날 밤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다 발견한 흑백 사진 한 장이, 내 삶의 색채를 완전히 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사진 속 윤기는, 찢어진 청바지에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웃고 있었다. 열아홉의 우리는 '남사친'이란 편리한 이름표 아래 서로의 감정을 숨겼다.
"이거 찍은 날 기억나?" 유리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유리는 잠시 사진을 응시하더니 "그 바닷가... 윤기가 고백했던 날이지"라고 대답했다. 내 심장이 멈췄다. 무슨 고백? 내게는 없었던 기억이었다.
사진을 다시 보니 윤기의 눈빛이 달라 보였다. 그때 그 바닷가에서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했던 걸까? 기억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었다. 찬바람이 불던 해변, 파도 소리, 그리고 윤기의 떨리는 목소리... "그냥 농담이야. 우린 친구잖아."
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기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유리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너... 정말 모르는 거야? 그날 윤기가 고백했을 때, 네가 먼저 '우린 그냥 친구로 남자'고 말했다며. 그 후로 윤기는 네게 다시는 감정 얘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대."
핸드폰을 내려놓고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그의 눈, 내 어깨에 살짝 얹은 손가락 끝에 담긴 조심스러움.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이는 것들이었다.
다음 날, 용기를 내어 윤기에게 연락했다. 그는 아직도 그 사진을 가지고 있을까? 그날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을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낸 메시지는 3년 전, 그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 사진 아직도 갖고 있어? 놀랍네. 주말에 시간 되면 만날래? 할 얘기가 있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얘기일까? 혹시 그때 그 바닷가의 진실?
카페에서 만난 윤기는 예전과 달라 보였다. 더 성숙해졌지만,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은 여전히 내가 알던 그 소년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찍은 사진들이야. 네가 모르게 찍은 것도 많아." 봉투 안에는 수십 장의 사진이 있었다. 모두 나였다. 웃고 있는 나, 책을 읽는 나, 하늘을 보는 나... 그리고 각 사진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고백들이 적혀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윤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진은 거짓말을 못 해.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어." 그의 손에는 반지가 없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의 흑백 기억에 천천히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