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의 배신: 남사친의 고백
소개팅 자리에서 마주한 남자가 내 남사친 민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카페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5년간 친구로 지내온 우리가 누군가의 설계로 이런 상황에 놓이다니.
"혹시 누가 장난친 거 아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준이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붉은 기운이 번졌다.
"아... 내가 요청했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커피잔을 감싼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사실 네 친구 유진이한테 부탁한 거야."
카페의 재즈 음악이 갑자기 귀에 들어왔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소리,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너무 선명했다. 내 심장은 귀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왜?" 한마디 질문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민준이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5년이야, 서연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네 곁에 있고 싶었어. 그런데 넌 항상 나를 '좋은 남사친' 이라고만 불렀지. 다른 남자들과 소개팅할 때마다 조언을 구하고, 실패할 때마다 위로해달라고 했어. 내가 얼마나 미치게 질투했는지 알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녹아내리며 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5년간 당연하게 여겨온 우정의 순간들이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시험 전날 밤샘 공부를 도와준 일, 취업 실패 후 술에 취해 울 때 집까지 데려다준 일, 생일마다 절대 빠지지 않고 보내온 메시지들.
"이제 더는 못 참겠어. 그냥 친구로 남느니 차라리 고백하고 거절당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 적어도 마음은 전했으니까." 그의 목소리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창밖으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카페 창문에 빗방울이 맺히며 세상이 흐릿해졌다. 내 마음도 그랬다. 분명했던 경계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웠어. 너를 잃는 게." 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그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는지, 몇 번이나 그 손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는지. 지금까지 소개팅으로 만난 어떤 남자도 민준이만큼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이게 우리의 첫 소개팅이라고 생각하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카페를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평소라면 망설임 없이 우산을 나눠 쓰자고 했을 우리는 이제 어색하게 서로의 손끝을 스쳤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에서, 모든 소개팅이 실패로 끝난 이유가 내 곁에 항상 있었던 사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