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타기의 남사친: 거리와 속도의 문제
미연과 나는 무려 8년 차 남사친 사이다. 처음 만난 날, 그녀가 내게 던진 첫 마디는 "너 연필 좀 빌려줄래?"였고,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우정은 대학 4년을 거쳐 사회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 술자리에서 미연이 내 손을 잡았다. 취기가 올라와서 그랬겠지만, 그 따스함이 내 심장에 전기를 통하게 했다.
"우리 뭐 하는 거지?" 그녀의 질문에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카페에 앉아 있는 지금도, 어제 밤의 기억은 안개처럼 뿌옇다. 미연은 맥주 잔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나는 숨을 고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쓰다. 평소보다 더.
"8년 동안 우리가 정말 친구였을까?"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커피 향과 그녀의 향수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묘하게 어지럽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어본다. 우리가 함께 본 영화 53편, 같이 먹은 라면 127그릇, 새벽까지 이어진 통화 89회. 그리고 한 번도 넘지 않았던 선.
"네가 사귀는 남자들 얘기 들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어." 드디어 8년 동안 용기를 내지 못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미연의 눈이 커진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카페의 소음도, 바깥 차들의 경적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내 심장 소리만 귓가에 울려 퍼진다.
"나도..."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내린다. "나도 네가 다른 여자들과 썸 탄다는 얘기 들을 때마다 질투났어. 근데 네가 내 남사친이니까... 이상했어,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우리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8년의 무게를 품고 있다. 아무도 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했던 시간들. 서로를 응원하면서도 실은 상대가 다른 이성과 가까워지는 것에 아파했던 순간들.
"그럼 우리는 8년 동안 서로 썸을 타고 있었던 거야?" 웃음이 나온다. 너무 어이없어서, 아니면 너무 명백해서. 미연도 웃는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항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멜로디였다.
"썸이라기보단... 우리는 우정이라는 안전지대에서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 같아." 미연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이번엔 어제와 달리 맑은 정신으로. "사실 친구로 지내는 게 편했을지도 몰라. 변화는 두려운 거니까."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는다. 따스함, 그리고 확신. "근데 알아? 남사친에서 연인으로 가는 길이 멀지 않을 수도 있어. 그저 우리가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이지."
미연의 눈에 별이 빛난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경계는 선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8년 동안 그 그라데이션 위에서 조심스레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전한 남사친의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리듬으로 함께 춤출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