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말: 보드게임에 갇힌 세계여행자
다이스를 굴릴 때마다 내 몸이 세계 지도 위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처음 알아차린 건, 지하철에서 심심풀이로 여행 보드게임 앱을 다운받은 그날이었다. 화면 속 주사위가 '4'를 보여줬고, 내 캐릭터는 서울에서 도쿄로 이동했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순간, 나는 실제로 도쿄의 시부야 횡단보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처음엔 미친듯한 환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타코야키 냄새, 귓가를 스치는 일본어 회화, 그리고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에 여전히 떠있는 보드게임 화면은 너무나 생생했다. 게임판의 내 말(駒)은 도쿄에 있었고, 현실의 나도 도쿄에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주사위를 굴렸다. '3'이 나왔고 게임 속 말은 파리로 이동했다. 눈 깜짝할 사이, 에펠탑 아래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바게트 향기와 프랑스어의 물결이 나를 감쌌다. 비현실적인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공포보다는 황홀감이 더 컸다.
그날부터 나는 보드게임 속 세계여행자가 되었다. 주사위를 굴릴 때마다 로마의 콜로세움, 이집트의 피라미드, 뉴욕의 센트럴 파크로 순간이동했다. 처음으로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비행기 표도, 호텔 예약도, 여행 일정도 필요 없었다. 단지 주사위를 굴리는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내가 그 규칙을 발견한 건 베니스의 곤돌라 위에서였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20% 남았다는 경고가 떴다. 당황한 나는 충전기를 찾아 헤맸지만, 이탈리아 플러그에 맞는 어댑터가 없었다. 배터리가 10%로 떨어졌을 때, 끔찍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게임이 종료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급해진 나는 다시 주사위를 굴렸다. '6'이 나와 뭄바이로 이동했다. 배터리 5%. 또 굴렸다. '2'가 나와 시드니. 배터리 2%. 마지막 힘을 다해 주사위를 굴렸다. '1'이 나와 서울 근처로 이동했다. 가까워! 하지만 배터리가 1%로 깜빡이며 화면이 어두워졌다.
절망적인 순간, 나는 게임의 또 다른 규칙을 깨달았다. 모든 보드게임에는 지름길이 있다.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탭해 메뉴를 열고 '홈으로 귀환' 버튼을 발견했다. 터치하는 순간, 화면은 완전히 꺼졌고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처음 게임을 시작했던 그 지하철 좌석에 앉아있었다. 옷에서는 여전히 베니스의 바닷물 냄새가 났고, 주머니에서는 파리에서 산 작은 에펠탑 열쇠고리가 나왔다. 핸드폰은 충전이 필요했지만, 게임 앱은 여전히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정말 여행 다녀온 거야? 언제 갔다 왔어?" 나는 미소지을 뿐이다. 다음 여행을 위해 보조 배터리를 충전하면서, 이번엔 어떤 규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한다. 모든 게임은 끝이 있지만, 이 여행이 끝나면 또 다른 게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주사위를 굴릴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