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귀신: 죽은 줄 알았던 내 업무
복사기에서 종이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퇴근한 지 두 시간이 지났고 33층 사무실에는 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뭐지? 다시 한 번, 종이가 프린터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소리.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텅 빈 사무실에 메아리쳤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내 자리에서 모니터 불빛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어젯밤 야근 끝에 남겨두고 온 보고서 초안이 열려 있었다. 커서가 혼자 움직이며 문서를 수정하고 있었다. 타이핑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철자 오류와 문법 실수가 하나씩 고쳐지고 있었다.
혀가 마비된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벽에 붙은 팀 사진에서 윤 과장의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석 달 전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그는 늘 보고서의 오타를 집요하게 찾아내던 사람이었다.
공포를 느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윤 과장님, 저 도와주시는 거예요?"
모니터가 깜빡이더니 메모장이 열렸다. 천천히 글자가 떠올랐다. '김 대리, 이번 프로젝트 중요해. 내가 못 끝낸 일인데.'
목구멍이 메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그날부터 나는 매일 밤 늦게까지 남았다. 사람들은 내가 승진을 노리고 있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윤 과장의 '지도'를 받으며 일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메모장에 적어 나를 가르쳤다. "사람이 아닌 숫자로만 직원을 평가하는 회사가 문제야." "네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나처럼 되지 마."
프로젝트가 끝나갈 무렵, 메모장에 마지막 메시지가 떴다. '내 자리에 갇혀있지 마. 이건 내 실수였어.'
다음 날 아침, 사표를 냈다. 회의실에서 팀장이 내 앞에 섰다. "갑자기 왜? 네가 이 프로젝트 끝내면 윤 과장 자리 너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저는..." 말을 고르던 중 팀장 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희미하게 서 있는 윤 과장도.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저는 제 길을 가려고 합니다. 윤 과장님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요."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날 저녁, 33층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서며 뒤돌아보았다. 내 컴퓨터 화면이 잠시 깜빡였다가 꺼졌다. 이제 윤 과장도, 나도 자유로웠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기억할 건 승진이나 마감이 아니라 우리가 놓친 시간들일 테니까.